200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헝가리 출신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청산(淸算)'(정진석 옮김,다른우리)이 번역돼 나왔다.


어린 시절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 수감됐던 작가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운명'(1975)을 출간한 후 '좌절'(1988)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한 기도'(1990) 등 나치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을 폭로한 '운명 3부작'을 내놔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도 '나치 치하의 강제수용소 경험을 절절한 언어로 생생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역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 '청산'은 '운명 3부작'의 완결편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주인공은 케세뤼와 B다.


동유럽 공산주의가 '청산'되는 시점에 소설의 주인공 케세뤼가 다니던 출판사도 '청산'될 위기에 처한다.


케세뤼는 아우슈비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해 '존재의 청산(자살)'을 선택한 B가 9년 전 썼다는 희곡 작품인 '청산'을 찾아 헤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희곡의 주인공이 케세뤼였으며 B가 쓴 희곡 내용과 현실의 케세뤼 행동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 등장한 또 다른 희곡 작품이 현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반복되면서 결국 케세뤼와 B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작품 이해의 열쇠다.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못 견디고 자살했지만 결국 도플 갱어(분신 혹은 자아복제)인 또 다른 나로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과거를 청산하고픈 욕망과 삶에 대한 의지를 동시에 표현한다.


소설의 제목인 '청산'은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청산'으로 '희망'과 같은 의미인 셈이다.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작가는 15세 때인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 이듬해 석방됐다.


75년 마흔 여섯의 늦은 나이에 발표한 '운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는 이후 브란덴부르크문학상(1995) 라이프치히문학상(1997) 벨트문학상(2000)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