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에세이] 매화 ‥ 고홍식 <삼성토탈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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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홍식 < 삼성토탈 사장 hs.ko@samsung.com >
봄이 오면 어릴 때 시골집 앞 뜰에 핀 매화가 항상 생각난다. 꽃샘 바람이 불고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 가지 않았는 데도 잎이 피기 전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항상 신기하게 생각했다.
2∼3월 눈 내리는 추운 날에도 피는 설중매는 선비들이 지극히 사랑하여 사군자에 속한다. 옛 선비들은 매화(梅) 난초(蘭) 국화(菊) 대나무(竹)가 여러 초목이나 꽃 중에서도 기품 있고 고결한 군자와 같다 해서 사군자라 불렀다. 매난국죽의 순서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순서에 맞추어 놓은 것이다.
매화는 이처럼 선비의 기개(氣槪)를 상징하는 동시에 우리 일상에서도 그 용도가 다양했다. 매화의 열매는 덜 익은 채로 소주에 담가 매실주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한방에서는 씨를 빼고 달인 뒤 고약처럼 만들어 배가 아플 때나 식중독 증상이 나타날 때 비상약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매년 마음만 먹었던 남도의 매화여행을 올해는 꼭 가볼까 생각한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고 전남 광양과 경남 하동의 경계를 이루는 섬진강 하류의 백운산 자락은 매년 3월이면 매화꽃으로 뒤덮인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가다가 본격적인 매화군락을 보려면 이제는 너무도 유명한 매화마을을 찾아야 할 것이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렌다.
매화를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퇴계 이황이었다고 한다. 퇴계의 매화 사랑은 남달랐다. 매화를 의인화해 시 90수를 넘게 지었고 생전에 이것을 모아서 매화시첩(梅花詩帖)을 만들기도 했다. 매화는 퇴계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퇴계는 매화가 피는 계절에 죽었다. 잘 알려졌듯이 퇴계는 임종하던 아침에 "매화에 물을 주어라"는 말을 남기고 오후에 앉아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매화 좋아하는 마음을 익히 잘 알 수 있다.
또 송나라의 임포(林逋)는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아(梅妻鶴子) 세상에 나가지 않고 오직 매화와 학을 기르면서 평생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 꽃은 따뜻한 봄에 피지만 매화는 추운 날씨에 피고 향기가 고고하기 때문에 격조 높은 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연유로 매화는 옛날부터 세상의 부침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곧게 지키는 선비에 비유되곤 했다.
梅寒不賣香(매한불매향),즉 '매화는 춥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은 현실의 영욕에 흔들리지 않는 기개를 이야기한 것이다. 최근에 과거사 진상규명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순간의 영광이 영원히 불명예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매화의 계절에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