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모임에서 정부의 기후변화협약 대책을 담당하는 에너지 전문가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교토의정서 발효로 온실가스 배출규제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이와 관련된 국제회의가 매년 수차례씩 열리는데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 중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얘기다. 지구 온난화문제로 고심하는 사람들은 정작 회의장 밖의 환경단체 시위대들 뿐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전세계 1백80여개국이 가입한 기후변화협약이 겉으로는 환경협약이지만 속내는 선진국들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놓고 싸우는 경제협약이라는 메시지다. 실제 회의가 열리면 온실가스를 줄이는 방법에 대한 토론은 없고 조금이라도 자국 산업에 유리한 기준을 만들려는 충돌만 있다고 한다.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무역장벽을 만들어 수입품을 규제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신보호무역주의의 태동에 다름아니다. 실제 EU는 자동차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08년까지 95년대비 25% 감축토록 규정해놓고 있어 그 때부터 팔리는 자동차는 1km를 달릴 때 1백40g 미만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해야 한다. 유럽 자동차회사들은 이 부문의 기술경쟁력이 높지만 우리는 그같은 기준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지금대로라면 국산 자동차의 EU지역 수출이 급격히 줄어들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은 미국이 국제사회의 비난에 끄떡 않는 것도 자국산업을 보호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하지만 미국도 자국 기업들의 환경관련 기술이 향상되면 교토의정서에 서명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결국 환경 보호무역주의 시대는 이미 시작됐고,앞으로 관련 기술수준에 따라 국제경제구조가 재편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자원 보유량보다는 에너지 관리 기술을 가진 나라가 경제강국으로 떠오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인 셈이다. 새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유리할까 불리할까. 현재로선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업종마다 기업마다 입장이 달라 종합적으로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기술의 성숙도에 따라 국가의 명운이 달라질 것이란 점이다. 자원이 없는 우리에겐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실제 긍정적인 조짐도 여러 군데서 나온다. 한 예로 석유산업을 들어보자.석유 한방울 나오지 않는 우리는 그동안 그로 인해 받은 설움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나라가 석유수출 1백억달러를 돌파했다면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지난해 우리나라의 석유수출은 1백1억7천만달러로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자동차 컴퓨터 선박에 이어 품목별 수출 6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정유업체들은 원유를 수입해 정제한 뒤 다시 수출하는데 전체 매출 중 수출비중이 40%를 넘는다고 한다. 국내 최대정유업체인 SK㈜의 경우 지난해 원유도입가격이 배럴당 평균 36달러였는데 수출가는 43달러로 배럴당 7달러 정도의 부가가치를 남겼다. 자원 하나없이 기술만 갖고 하는 짭짤한 장사임에 틀림없다. 이런 흐름을 읽었는지 산업자원부는 이달 초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자원패권주의'가 끝나고 '기술패권주의'시대가 온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기술,특히 환경과 에너지관련 기술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만큼 중요해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정부가 과연 어느 정도 노력하고 있는지는 궁금하다. 환경보호주의시대는 이미 시작됐다는 점에서 정부와 기업들은 좀더 다부지게 마음을 가져야 한다. 육동인 논설위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