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아비만한 자식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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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산 < 소설가 >
처음엔 농사를 두엄으로 지었다.
그러다가 화학비료와 농약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 놀라운 수확량에 탄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자연농법이 각광을 받는다.
그런가하면 다산(多産)이 빈곤의 원흉으로 치부됐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산아제한 정책을 썼지만 지금은 또 출산을 장려한다.
세상은 이처럼 돌고 도는 것이며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늘은 반드시 어제의 토대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변하면 가치관도 바뀌지만 일이 그렇게 흘러가는 데는 '과정'이란 게 있다.
그 과정을 간과하면 변화가 무의미해지고 발전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어떤 이가 빵을 여러 개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아 우유를 마셨더니 비로소 배가 불렀다.
그러자 괜히 빵을 먹었다,처음부터 우유를 마셨으면 쉽게 배가 불렀을 거라고 투덜거렸다는 우화가 법구경(法句經)에 나온다.
현상만 보고 과정은 무시하거나 오늘만 생각하고 어제를 잊는 건 모두 어리석고 허망한 일이다.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온 건 건설과 개발 덕분이다.
정부와 국민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뭉쳐 건설하고 개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지금도 동남아의 여느 나라들처럼 가난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환경에 눈을 뜬 건 근년의 일이다.
가난과 허기를 털어 내고 시쳇말로 먹고살 만한 여유가 생기니까 양(量)보다는 질(質)을 논하게 됐고 무분별한 개발의 폐해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최근 대형 국책사업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갈등은 개발주의와 환경주의의 충돌이다.
환경주의자들은 과격한 수단을 동원해 갈등을 증폭시켰고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국책사업은 여론에 밀려 중단됐다.
그 결과 수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혈세가 낭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오늘이 있기까지 민족사에 막대한 공헌을 해온 개발시대의 가치관으로 보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다.
그것이 세상이다.
과거처럼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옳거나 그른 시대는 지났다.
아무리 자연농법이 각광을 받아도 아직은 화학비료와 농약도 필요하다.
자연농법으로 지은 농산물만 가지고 현실적으로 모든 국민이 다 먹고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개발과 환경도 마찬가지다. 두 시각이 다 필요하고 서로 공존해야한다면 무엇보다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경제논리만을 내세워 환경을 파괴하거나 환경의 중요성만을 강조해 국책사업을 가로막는 행동은 모두 독선이고 악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개발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은 앞으로 더욱 고조될 전망이다.
그때마다 극단적인 방법이 등장하고 두 세력이 힘과 오기로 충돌한다면 분열의 상처는 깊어지고 그 피해와 손실은 고스란히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역대 정부가 개발에 몰두한 나머지 환경영향평가를 소홀히 해온 건 사실이다.
1백46개국 중 1백22위인 세계 환경지수는 우리가 얼마나 환경 후진국인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부끄러운 수치다.
그런 가운데 환경부가 올해부터 시행하거나 앞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여러 가지 제도와 대책들은 사안의 중대성을 깊이 인식한 것 같아 반갑다.
아울러 환경주의자들도 무턱대고 자기 주장만 펼칠 게 아니라 개발의 대안도 함께 제시할 수 있는 성숙한 기량과 시민의식을 갖춰주었으면 한다.
특히 어제를 부정하고 상대를 무시한다거나 목숨을 담보로 흥정을 벌이는 투의 저속한 타협방법은 애들이 보고 배울까 겁난다.
민주주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속담에 아비만한 자식 없고 형만한 아우 없다는 데도 세상이 점점 발전하는 건 후대의 번영이 항상 선대의 성과 위에 건설되는 까닭이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는 것,상대가 있어 내가 있고 어제의 토대 위에 오늘이 있는 것,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緣起說)의 가르침도 그러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