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장관 취임 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에게 20여분간 '독도 강의'를 하고 있던 지난 20일 일요일 아침,일본 후쿠오카 북서쪽 해역에서는 지진이 발생했다. 오전 10시53분,규모 7.0의 강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은 지진 발생 1분 만에 기상청의 지진경보와 방송이 동시에 이뤄졌고 3분만에 지진해일주의보가 발령됐지만, 한국에서는 지진발생 27분이 지난 11시20분이 돼서야 해일주의보를 발령했다. 불과 10분 뒤에는 남해안에 해일이 닥치는 상황이었다.불행 중 다행하게도 이번 지진은 지각이 수직으로 움직였던 지난 연말의 동남아 대참사 때와는 달리 수평으로 진동해 큰 해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동안 여러 차례 자연재해를 인재로 키운 우리의 재해대책시스템에 대해 비판과 정비가 연례 행사처럼 뒤따랐지만 여전히 우리는 말과 감정만 앞선다. 3·1절이면 시청 앞에서 다투듯이 대립적인 대규모 집회를 하던 좌와 우가 이번에는 일본대사관에 모여 일본수상 화형식을 하고,손가락을 절단하고,할복시도도 서슴지 않는다.연일 공중파 방송이 독도문제에 전파를 할애하고,정치인들은 독도로 날아가 애국심 과시대열에 동참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이다. 일본의 일개 현이 제정한 조례를 가지고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이 나서서 엄중하고 심각한 어조로 경고할 만큼 사안이 중요했기에 대통령도 미 국무장관과의 회동 때 그 소중한 시간을 '독도 강의'에 할애했을 것이리라. 한국편을 들 줄 알았던 미국이 '독도는 한·일 양국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한 발 빼자,일각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수도권 이전을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권이 격돌하더니 대통령이 진두지휘하는 초강경 대일공세에는 이론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현 집권층은 이번 사태를 한국이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중국과 러시아에 더 가까이 가는 새로운 동북아 세력 지형도를 그려볼 계기로 전환시키고 있다.'미국은 동맹이고 북한은 동포다'고 했고 '일본의 패권주의를 뿌리 뽑겠다'고 한다.'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판도는 변화할 것이다'는 것이 최고 통치자의 국제정치관이다. 한국의 지형학적 위치 때문에 한국이 주변 강대국들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는가에 따라 세력판도에 변화가 온다는 것은 자명하다.문제는 무엇을 위한 관계 변화인가 하는 것이다. 짝짓기 산수에서의 균형과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정치에서의 균형 산술과는 괴리가 있다.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정작 핵무장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정을 위협하는 북한에 강경하게 나오는 미국을 적대시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혼동하는 것이다. 불과 얼마전 고구려사 왜곡에서 입증되었 듯이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는 패권국가다.일본을 패권국가라고 비난하면서 또 다른 패권국가인 중국에 근접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 미국이 가끔 한국 역시 그들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잊어버린 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적대시해서 한국이 얻을 실익은 없다.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일본에 '독일과 같이 돼달라'는 요구는 단지 우리만 하는게 아니지만 일본이 결코 그러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우리는 익히 보아 왔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발전시켜가는 실익이 그 반대보다 크다. 모든 외교는 국내용이고,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정치상품이 애국심이라고 했던가. 한국의 지도자들은 강대국 앞에서 큰 소리 치기를 좋아한다.유감스럽게도 그 국가는 재난이 닥칠 때 그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