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철 < SK 사장 hcshin@skcorp.com > 지리산 봄은 섬진강 5백리 물길 따라 산자락마다 피어나는 산수유와 매화꽃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온다. 벽소령 눈 녹은 물이 부처 많은 칠불사를 끼고 겹겹한 쌍계 골짜기를 흘러내려 옥류천 맑은 물로 구슬을 꿰듯 이어져 나오면 화개골은 어느 사이 꽃 소식에 바빠진다. 올해도 털보 시인이 봄 소식을 전해왔다. 산이 좋아 산에 사는 그는 우전다향(雨前茶香)을 피워 올리며 '산과 들 소리에 덮여도 산국처럼 살아가는 곧은 시인'이다. 바람과 나무와 돌과 하아얀 마음에 불빛을 심고 싶어하는 그는 우리가 듣지 못하는 자연의 소리를 알아듣고 시로써 전해 주는 맑은 귀를 가졌다. 그는 섬진강 물 위로 건너온 바람이 산자락마다 산수유와 매화 꽃은 불러내었지만 아직도 두류산 골짜기의 잔설을 걷어가지 못하고 화개골에 머뭇거리고 있어 벚꽃 방울이 흩날리려면 열흘은 더 있어야 된다고 그때 내려오라고 말했다. 평소에도 그는 차꽃 같은 마음밖에 줄 것이 없다고 '끽다거(喫茶去)' 다실(茶室)을 늘상 비워 놓고 다니는데,이곳은 손님들이 알아서 마시고 적당히 값을 놓고 가는 곳이다. 다실의 천장,벽,창문에는 손님들이 남겨 놓은 편지 글들이 달동네의 판자촌 지붕처럼 닥지닥지 붙어 있다. 몇 개월 만의 통화 끝에 상묵 스님 소식도 물었으나 못 들은 지 오래되었다는 대답에 마음은 어느 사이 지리산 중턱의 '지통사'로 급하게 달음질친다. 일찍이 어머니를 떠나 어린 나이에 수도승이 되었으나 그림 그리기를 버릴 수 없어 온갖 눈치 속에 부득이 절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화개골 형제봉 중턱에 신라시대 옛 고찰의 폐허를 찾아내어 손발이 불어터지게 영주 부석사와 같이 돌로 감싸진 지통사를 세우고 홀로 가람을 다듬어내었다. 부처님 모신 불당보다 더 큰 화실을 만들어 그림과 독경을 번갈아 하면서 20년 세월을 수많은 그림으로 채워 왔다. 3년 전 서울 인사동에서 연 부처님과 어머님을 소재로 한 전시회에는 필자도 다녀왔는데,그렇게도 아끼던 그 모든 그림을 겨울 깊은 밤의 화재로 지리산 속에서 불태워 버렸다. 한줌의 재 속에 묻혀 버린 지난 20년의 세월에 목 놓아 울었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도종환의 '내 안의 시인(詩人)'을 읊어 보면서 흐트러진 봄 바람이 깊은 절 고요한 마당까지 성큼 들어 차기 전에 조용히 앞섶 여미고 상묵 스님을 만나 보고 싶다. 그리고 털보 시인의 '끽다거 다실'에도 다녀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