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위암 장지연이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임을 공식적으로지적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진석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한국언론연구회(총무 김동철)가 4일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시일야방성대곡'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주제논문 '시일야방성대곡 100주년의 역사적 의미-위암 장지연의 항일 언론활동과 사상적 변모'를 통해 이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 가운데 "대황제 폐하의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이므로 이등박문이 스스로 알아서 파기했어야 한다(정진석 교수가 현대문으로 옮김)"는 구절이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지적한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장지연은 논설 바로 아래 지면에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을 실어을사5조약의 부당성과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전말을 소상히 알렸다. 이 날짜 신문은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도 받지 않은 채 배포돼 장지연은 구속됐고 황성신문은 정간됐다. 그러나 영국인 배설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가 이튿날신문에 장지연의 용기를 극찬하며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외국인에게까지 널리 알렸다. 정진석 교수는 "을사조약은 고종이 날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논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제정치학자들의 주장"이라며 "시일야방성대곡에서이 문제를 제일 먼저 거론한 장지연의 탁월한 안목이 잘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정 교수는 장지연이 친일파라는 의혹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대입장을 보였다. 일부 학자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장지연이 주필로 재임했던 경남일보 1911년 11월 2일자 1면에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축하하는 한시가실린 것을 그 증거로 들고 있다. 정 교수는 △천장절 전후 장지연은 숭양산인(崇陽山人)이란 필명으로 한시를 자주 실었는데 문제의 한시는 무기명인 데다 당시 경남일보 주변에 한시에 능통한 이들이 많아 그가 지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고 △경남일보는 경영과 편집체계를 갖추어 지역 유지들이 초빙한 주필은 편집권이 없었으며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던 시기에 경영이 어려웠던 지방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 교수는 합방 이후 현실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친일파로 단정할 정도는 아니며, 시대사적인 불가피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장지연이 합방 이전까지 언론인으로 행동했던 업적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면서 "오늘의 관점에서 비판받을 부분이 있다하여 격하하려는 태도는 경계해야 마땅하다"고 역설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