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30일 오전 9시.
서울 외환시장이 문을 열자마자 달러를 사자는 주문이 쏟아졌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1천원선 붕괴를 위협받았던 원.달러 환율은 금세 1천20원선을 넘어섰다.
환율 하락에 애간장을 졸이던 외환당국자들은 모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하던 환율 하락세가 멈추는 것인가.
그러나 곧바로 10억달러가 넘는 국내 대기업들의 달러매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외환당국의 설렘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장중 한때 1천26원40전까지 올랐던 환율은 1천23원선에서 상승세를 멈춘 것.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였다.
다음날인 31일.
장 초반부터 기업체들의 달러 '팔자' 주문이 줄을 이었고,이달 1일에도 그런 추세는 지속됐다.
결국 원.달러 환율은 이틀 새 15원이상 까먹으며 1천8원선으로 고꾸라졌다.
기업들의 '묻지마식' 외환운용이 국내 외환시장을 흔들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일정 수준에만 도달하면 무조건 보유 달러를 털어내는 '일몰조항(sunset clause)' 방식의 외환운용이 환율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기업 스스로 수출가격 경쟁력을 깎아먹고 있는 셈이다.
이진우 농협선물 금융공학실장은 "최근 들어 엔·달러환율이 오르는데도 원·달러환율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원화환율이 1천20원선 언저리에 도달하면 무조건 달러화를 내다 파는 기업들의 도식적인 환율운용방침 때문"이라고 말했다.
권택우 스탠다드차타드은행 부장은 "6일에도 엔·달러 환율이 1백8엔대까지 올랐으나 원·달러 환율은 등 국내 기업의 매도주문으로 오히려 전날에 비해 떨어졌다"며 "최근에는 이 같은 일몰조항식 외환운용이 중소기업에까지 유행처럼 확대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기업들이 매도 일변도의 외환운용을 하는 것은 환율이 앞으로 비교적 큰 폭으로 장기간 하락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대부분의 전망기관들은 올해 평균 원·달러 환율이 1천원선 밑으로 떨어질 것(삼성경제연구소의 경우 9백60원)으로 내다보고 있다.
외환당국이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신후식 대우증권 파트장은 "작년 말 외환당국이 그동안의 개입정책을 포기함에 따라 단기간에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의외로 큰 폭의 환차손을 입었다"며 "이로 인해 기업들이 외환당국을 믿지 못하고 환율이 오를 때마다 달러를 파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기업들의 예상과 달리 환율이 앞으로 오를 여지가 크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무역적자 문제가 달러 약세(원·달러 환율 하락)로만 해결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데다 앞으로 미국의 연방기금금리가 연 4%까지 인상될 경우 일본과 유럽은 물론 한국에 비해서도 높은 금리수준을 유지하게 되고,이것이 달러강세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것.결국 달러 자산의 가치가 높아져 달러화가 강세(원화 약세)로 돌아설 여지가 크다는 얘기다.
한상춘 논설·전문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