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孝鍾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지난 5일 일본 문부성은 2006년부터 사용할 교과서에 대한 검정결과를 발표했다. 우리는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이번 검정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는데,‘혹시나’가 아닌 ‘역시나’ 검정이었다. 문부성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 공민·지리 교과서 및 일본의 침략사를 왜곡·미화한 후소샤판(版) 역사교과서에 대해 합리적인 수정요구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침을 내려 왜곡서술을 부추긴 흔적이 역력하다. 교과서 기술에 이웃나라의 비판을 배려한다는 이른바 “근린제국조항” 조차 사문화된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이나 복속국묘사 조선출병 등 고대사나 중세사 부분에 있어 일본이 한국학계의 비판이나 지적을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일본 정부가 늘 하는 방식대로 “학설상황에 비춰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없음”이라고 강변한다면, 일본학계의 지적수준의 얕음을 탓할지언정 다른 방법은 없다. 물론 낮은 지적수준은 꾸준하면서도 심도있는 고대사 연구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특히 한국 사학계의 분발이 기대된다. 그러나 20세기 일본의 침략사와 독도문제는 다르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고 36년간 강점한 것은 학문을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실존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므로 지금 바꿀 수는 없다. 그러기에 사실은 역사적 진실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웃나라가 힘이 약하다고 하여 침략했다면 ‘부끄러운 느낌’에 앞서 ‘죄의식’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이점에서 일본은 과거 침략의 역사를 단순한 ‘수치심’의 관점보다 ‘죄책감’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수치심’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문제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실을 숨기거나 미화하면 희석시킬 수 있으나,‘죄책감’은 남의 이목과 관계없이 “나의 죄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자책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반성의 요소가 된다. 우리가 일본교과서 왜곡을 우려하는 것은 침략에 대한 ‘죄책감’은 지워진지 오래고 이제는 침략에 대한 ‘수치심’마저 지우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식민통치를 통해 한국을 근대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대방 국민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가학적 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독도문제만 해도 그렇다. 독도는 단순한 영토문제가 아니다. 단순한 영토문제라면 국제재판소에 제소하거나 국제법으로 다뤄야한다는 일본정부의 주장에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독도는 영토문제이기에 앞서 한반도 침략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1905년 러일전쟁 당시 군사작전을 지원할 목적으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일본의 행위야말로 한반도 강점의 일환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독도를 자신의 땅으로 강변하고 있는 일본인들, 특히 식민통치를 통해 한국을 근대화했다고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는 일부 일본 지식인들은 자국중심의 닫힌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낡은 영광을 복원시키려는 복고적 민족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이다. 바로 이점이야말로 한반도 침략과 강점에 대해 어떠한 원죄의식이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지식인의 역할을 새삼 반추하게 된다. 지식인은 국가권력이 부는 피리에 따라 춤을 추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식인은 보편이성을 추구해야할 중차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이 보편적 가치와 유리된 가학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국민의 도덕성을 최면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지, 무비판적으로 편승해서는 곤란하다. 지식인이 보편적 이성의 담지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려면, 침략사관에 입각한 복고적 민족주의보다 미래를 향한 건설적 민족주의, 이웃을 압박하는 가학적 민족주의보다 이웃과 평화공존할 수 있는 선린민족주의를 가꾸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교과서문제와 독도문제에서 일본의 양심있는 지식인들이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다. 한일간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위해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열린 민족주의를 받아들이고 이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첨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