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전쟁- 탐색전은 끝났다] (1) 길음 뉴타운에 나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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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색전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전면전이다."
은행전쟁이 2·4분기 들어 본격적인 불꽃을 튀기고 있다.
우수고객 확보를 위해서라면 출혈도 마다하지 않는다.
예금금리는 올리고 대출금리는 내리는 이른바 '가격파괴'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은 체질개선과 구조조정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국민·우리·신한(조흥)·하나은행 등 '빅4'는 구조조정을 사실상 매듭지었다.
외국자본으로 넘어간 외환은행 한국씨티은행 제일은행 등도 시장공략의 칼을 빼들었다.
제한된 시장을 놓고 은행들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갈수록 격화되고 있는 뱅크 워(bank war)의 실태를 시리즈로 짚어본다.
"고객님,저희 은행에서 제일 싼 금리로 대출해드립니다. 상담 한번 받아보세요. 사은품도 받아가시고요."
지난 2일 서울 길음 뉴타운의 대우푸르지오 아파트 단지.입주 1개월을 앞두고 사전 점검기간 마지막 날이다.
단지 입구에는 어깨 띠를 두른 은행원들이 이른 아침부터 나와 입주자들에게 대출 안내문과 사은품을 건네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흘째 이곳으로 출근했다는 H은행의 김모 과장은 "요즘은 내가 은행원인지 유흥가 '삐끼'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 고객을 놓고 경쟁 은행 직원들끼리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띈다.
단지 곳곳에 걸린 '파격적인 대출세일'을 알리는 플래카드,이동점포로 개조된 대형 차량은 마치 선거판을 떠올릴 정도다.
현장 사무소 주변에는 시중은행들이 임시점포로 설치한 천막들이 빼곡이 들어섰다.
이날 길음 뉴타운 푸르지오 단지에 나온 은행원은 줄잡아 3백여명.시중은행마다 인근 점포와 본사 지원팀에서 30∼50명씩의 마케팅 인력이 투입됐다.
오후 4시께 입주자들이 점검을 끝내자 현장 사무소 주변에는 은행원이 고객보다 더 많아지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8개 시중은행이 한 곳에 '집결'한 것은 2천억원 규모의 대출 시장을 잡기위해서.모든 입주자들이 사전 점검일에 아파트를 보러 온다.
은행으로선 단기간에 많은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2천2백78가구가 1억원씩만 대출을 받아도 그 규모는 2천억원에 이른다.
이날 국민은행 본사에서 파견나온 손홍익 리테일상품팀 차장은 "올해 2천가구 이상 입주하는 대형 단지가 손에 꼽을 정도"라면서 길음 뉴타운 대출시장은 대어(大魚)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의 마케팅 경쟁은 더욱 불꽃 튄다.
가령 A은행이 '연 3.90% 대출'이란 플래카드를 걸어놓으면 몇 시간 후 B은행은 플래카드 '3.89% 대출'로 바꾸는 식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금리는 어느새 연 3.82%까지 떨어졌다.
S은행 관계자는 "집단 대출마케팅은 개별대출보다 마케팅비용이 저렴해 금리할인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 3.8%대의 대출금리는 현재 주택담보대출 최저 금리인 4.45%에 비해서도 0.6%포인트 이상 낮은 수준이다.
물론 초기 6개월간 적용되는 일종의 '미끼 금리'이지만 은행원들도 "노마진은 커녕 밑지는 장사"라며 혀를 내두른다.
이처럼 금리경쟁이 한계에 부딪치자 제일은행 등은 컴퓨터 모니터,청소기 등 각종 경품을 내걸고 고객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
길음 뉴타운의 이같은 풍경은 은행들이 벌이고 있는 총성없는 전쟁의 한 단면일 뿐이다.
전선은 비단 주택담보대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VIP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고금리 특판예금은 연중행사로 바뀌었다.
우량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대출금리를 더 깎아주겠다"며 손을 내밀고 있다.
수수료 수입을 위한 펀드 및 보험판매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점포 직원들은 본부로부터의 실적 채근에 밤잠을 제대로 못 이룰 정도다.
J은행 과장은 "노이로제에 걸린 직원들이 적지 않다"면서 "은행 간 실적경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두렵다"고 말했다.
은행장들이 작년말 일제히 전쟁을 화두로 던졌을 때만 해도 '내부용' 쯤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영업전쟁은 현실화되고 있으며 그 강도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는 게 금융계의 진단이다.
물론 과거에도 은행간 경쟁은 없지 않았다.
당시 경쟁은 신상품 개발이나 서비스의 차별화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젠 상품의 가격,즉 금리가 경쟁의 주된 수단이다.
은행 관계자들은 "제살 깎아먹기식이지만 고객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김대평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국내 은행들이 비로소 제대로 된 경쟁을 하고 있으며 이 경쟁의 강도는 갈수록 더 높게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은행경쟁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금융 소비자들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