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 국제대학원장 > 1960년대 중남미국가들에 외국인 투자자는 자본 기술 등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가져다주는 산타클로스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국부유출, 토종기업 집어삼키기와 같은 병폐가 드러나자 70년대 세계적으로 대두된 자원민족주의 물결과 함께 외국자본과의 밀월관계가 깨진다. 요즘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중남미의 과거가 생각난다. 외국인 이사수 제한, 5%룰에 대해 외국 언론들이 '한국은 경제 국수주의로 회귀하고 있다'고 표독스런 공격을 하고 있는 가운데 국세청까지 세무조사의 칼을 빼들었다. 투기성 외국펀드가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 부동산투기 등으로 수천억원을 챙기고도 세금 한 푼 안냈으니 국민들이 신임 국세청장의 조치에 환호할 만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10위의 통상대국답게 흥분된 감정보다는 차분한 경제논리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우선 WTO(세계무역기구) 시대 개방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라는 현실을 잊어선 안 된다. 한번 내린 상품 양허관세율을 마음대로 못 올리듯 투자도 일단 문을 열면 다시 걸어잠그기 힘들다. 차라리 처음 개방할 때나 이중과세방지협약을 맺을 때 투기성 외국자본의 병폐를 철저히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어야 했다. 정부가 외국자본을 다루는데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게임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세계 언론의 집중포화로 국가 이미지 손상은 물론이고 투자국 정부와의 통상분쟁으로까지 비화할 수도 있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역사적으로 외국자본 길들이기에 깨끗이 성공한 나라가 별로 없다. 또한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들 사이에 반(反)외국자본 정서가 부쩍 고개를 들고 있는데 자칫 정부가 나서서 이를 부채질하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외국자본에 대해 배타적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핑계만 주어지면 다시 과거로 회귀할 여지가 아주 크다. 반미, 독도 문제 등으로 요즘 가뜩이나 외국에 대해 흥분 잘하는 국민들이 돼가고 있는데 경제 분야에서마저 '외국자본 때리기'가 번지면 그 결과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론 금감원 국세청이 제각기 저격수로 나서는 개별플레이를 지양해야 한다. 경제부총리를 사령탑으로 해 종합적 전략을 세우고 글로벌 스탠더드의 틀 속에서 외국자본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우선 정부는 국제적으로 소리만 요란하고 실속이 의문시되는 직접규제보다 실질적 통제(effective control) 전략을 잘 활용해야 한다. 한국에서 정부의 보이지 않는 입김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다는 것 정도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잘 알고 있다. 일부 외국자본의 안하무인격인 전횡은 어쩌면 환란 이후 너무 성급히 빗장을 푸느라 정부가 시장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라도 적대적 M&A, 투기적 행위 등에 대해 정부가 강력한 시그널을 시장에 보내면 요란을 떨지 않고서도 외국자본의 행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촌 경제시대에 걸맞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 외국자본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금융산업의 경쟁력 향상과 함께 현재 은행 증권 등 업종별로 돼있는 40여개의 복잡한 금융관련 법체제를 기능별 입법으로 대폭 축소하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에 채운 역차별의 족쇄를 풀어줌으로써 국내기업과 외국기업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게임의 장'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은 독일 가서 한국에 투자하라고 권유하는 바로 그때 국세청은 외국자본 세무조사의 칼날을 빼드는 손발 안 맞는 해프닝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다행히 국제감각을 지닌 신임 한덕수 부총리의 시의적절한 한마디가 외국인의 불안을 잠재우고 있지만 외국자본문제만은 정부가 부처별 한건주의에서 벗어나 일관성있는 한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