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지금이 변할 때다] (5) 부작용 큰 산별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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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의 요구안을 들어주었는데 막무가내로 파업을 벌이는 거예요.외국인 사장이 참 어이 없어 하더라고요.외국에선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라는 거죠."
경주에서 제조업을 하고 있는 B사의 P노무담당 이사.그는 지난 2003년 5월 노사쟁점이 해소됐는데 파업을 벌인 노조의 엉뚱한 행태에 대해 지금도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이 회사 노조는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의 지침에 따라 주5일 근무제 실시와 비정규직 차별철폐,근골격계질환 대책 등을 주요 쟁점으로 내걸었다.
이 가운데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근골격계 질환문제는 이 회사에서는 큰 이슈가 되지 않고 주5일 근무제도 도입키로 노사가 잠정합의한 상태였다.
노사간에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그럼에도 노조가 파업을 벌이자 외국인 사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다.
국내 노사불안 요인 중 하나가 산별교섭이다.1백여개 이상의 노조를 거느린 거대한 세력으로 변한 공룡노조가 협상 때마다 힘과 투쟁을 과시하며 회사측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산별노조를 결성해 정치세력화를 이루자"는 구호대로 산별노조는 노동계의 정치세력화에 절대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생산현장에는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국내 노사분규 건수는 모두 4백62건.이 가운데 산별노조에서 벌인 파업건수가 절반을 넘는 2백68건에 달하고 있다.택시노조 90건,금속 76건,보건의료 66건,시내버스노조 37건 등을 기록했다.산별노조가 있는 곳에 파업이 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산별노조들은 사용자들을 압박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기도 전에 미리 투쟁일정을 짜놓고 거기에 맞춰 파업을 벌이기 일쑤다.회사측은 별다른 쟁점도 없이 파업을 강행하는 노조의 호기(?)에 큰 손실을 입고 있다.
산별교섭이란 무엇인가.동일산업의 여러 노조가 단일노조를 결성한 뒤 사용자측과 공동교섭을 벌이는 형태다.따라서 산별교섭은 교섭비용을 줄일 수 있고 노조위원장의 기득권을 약화시킬 수 있어 노사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측면이 있다.단위 사업장에서 공장점거 등 무분별한 파업행태도 상당히 줄어들 수 있는 이점이 있다.이 때문에 국내 노사관계가 안정되려면 산별교섭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동전문가들이 많다.
하지만 국내 노동현실은 어떤가.협상 때마다 집단파업이 연례행사처럼 벌어진다.중앙단위의 산별교섭이 끝나고 나면 다시 지역별,지부별로 추가협상을 하며 이중 삼중의 교섭비용이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경영계에서는 산별교섭을 하자는 노동계의 요구에 대해 손사레를 치고 있다.두산중공업 회사측이 지난 2002년 노조가 산별교섭을 요구하며 장기간 파업을 벌였는데도 이에 응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노조원이 수천명 되는 회사가 수십명에 불과한 회사와 같은 자리에 앉는 '불균형협상'을 꺼리는 점도 있지만 산별교섭의 한계도 작용하고 있다.
산별교섭에 대한 거부감은 대기업노조도 마찬가지다.지난해 8월 산별노조인 민주노총 산하 보건의료노조가 노사간 협상을 타결했을 때 서울대병원노조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보건의료노조 탈퇴의사를 밝혔다.'근로시간 단축 및 임금 등에서 산별합의안이 지부협약안이나 취업규칙에 우선한다'는 산별합의안 10장2조가 노동조건을 악화시킨다는 게 이유다.노조원 2천2백명으로 1백20여개 보건의료노조 가운데 최대규모인 이 노조만 산별교섭안을 거부한 것이다.내부 반발과 대형사업장의 이기주의라는 노동계의 비난 등으로 탈퇴시기가 늦춰지긴 했지만 서울대병원노조는 결국 이달 초 보건의료노조를 탈퇴하고 기업별로 복귀했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지난 2003년 말 투표를 통해 금속노조에 가입하려 했으나 반대하는 노조원들이 많아 실패하고 말았다.이 회사 노조원들은 4만명이 넘는 노조가 근로조건이 열악한 수십명,수백명의 사업장 노조와 한 자리에 앉아 협상을 하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다.민주노총 금속노조의 경우 가입조합원 14만명 중 4만명만 산별교섭에 참여하고 있고 자동차 중공업 등 대형사업장은 대부분 빠져있는 상태다.
지금 세계 노동현장은 기업간 경쟁이 심해지고 임금격차도 벌어지면서 산별교섭에서 기업별교섭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그런데 기업간 격차가 많이 벌어져 있는 한국의 노동현장은 거꾸로 산별교섭을 추진하고 있는 점이 아이러니컬하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