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지금이 변할 때다] (7) '왕따풍조'가 노동운동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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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 산업단지내 한국네슬레에 근무하는 A씨.그는 이 회사 노조의 파업이 끝난 지난 2003년 12월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1백45일간 계속된 파업이 극적으로 타결돼 공장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노조의 무리한 파업행태에 동의할 수없어 조합을 탈퇴한 그에게는 무서운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신자는 자폭하라. X같은 XX,너만 잘났냐,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는 등의 언어 폭력과 공장 안팎에서의 왕따가 잇따랐다.
그와 함께 노조를 탈퇴한 63명의 근로자들 모두 그와 비슷한 곤욕을 치렀다. "정말 사람이 싫었습니다. 불법파업은 안된다는 판단에서 조합을 탈퇴했는데 배신자라는 오명을 씌워 그렇게까지 정신적 린치를 가할 줄은 정말 몰랐다"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다.
반노동운동 또는 탈(脫)강경투쟁에 대한 사업장 내 왕따(집단 따돌림) 풍조가 합리적 노동운동을 저해하는 또 다른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노조 지도부의 강경투쟁 노선에 반기를 들면 회사측의 프락치로 몰아 그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릴 정도로 사업장 내 왕따가 심각합니다."(울산지방노동사무소 K근로감독관).그러다 보니 일반조합원들은 불법파업인줄 알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정유업계 사상 처음으로 파업을 일으켰던 GS칼텍스(구 LG칼텍스정유)노조. 당시 이 회사 노조의 왕따에는 노조원들의 부인까지 가세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조합원 부인들로 구성된 부녀회가 주도했다. 그들은 불법 파업을 거부하고 파업현장을 빠져나온 조합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아파트 문에 '배신자'라고 쓰인 인쇄물을 도배질했다.
근로자들이 여천단지 내 사원아파트에 모여산다는 점을 악용해 파업이탈자에 대해서는 가족 전체를 배신자로 몰아붙여 조합원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
파업이 끝난 뒤 회사측은 사원아파트의 이러한 부작용을 감안해 사원단지를 처분하는 방안까지 검토했을 정도다.
2002년 발전노조 파업이 38일간이나 지속됐을 때도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조합원들은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했다.
파업대열에서 이탈한 일부 조합원들은 업무 복귀 후까지 동료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적 고통을 당했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노조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조합원은 '상조회' 등에서 빼버리기도 한다.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원 J씨는 "상조회에서 빼버리겠다는 말이 가장 무서운 협박"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이 상을 당했거나 결혼하는 등 경조사 때 온갖 허드렛일까지 거들어주는 친목단체인 상조회에서 제명당할 경우 직장에서 배겨낼 재간이 없다는 것.
왕따는 노조의 '몸집불리기'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최근 울산의 건설플랜트노조 파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울산지역 건설플랜트 일용직의 경우 노조가입자보다 비가입자가 더 많다. 이 때문에 노조가입자가 적은 사업장에서 태업을 하거나 비노조원에게 눈치를 줘 노조가입을 강요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단위사업장 노조간부들이 지역 노조활동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강경투쟁을 펼치는 경우도 많다. 지역 단위의 노조연맹조직에서 큰소리를 치려면 단위노조의 투쟁성을 어느정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매년 파업으로 골머리를 앓던 A산업 노조는 90년대 후반 "올해는 A산업노사가 협상에 빨리 착수할 계획"이라고 쓴 모 일간지 기사를 문제 삼았다.
이 노조는 혹시나 기사 한줄 때문에 지역 노동운동가들로 부터 "맛이 갔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 한 것이다.
회사 경영이나 조합원들의 임금인상과는 아무 상관없이 단지 노조간부들의 투쟁성을 과시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다.
노사화합을 선언하거나 임금 및 단체협상을 무교섭으로 타결하는 사업장들도 지역 강성노조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일쑤다.
배규식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노조 내에서 여러 의견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토론 등 민주적 방법을 견지해야 한다"며 "처벌이 불가피할 경우라도 비인간적인 왕따보다는 노조 내부의 징계절차를 거치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