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태 <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 소비가 살아나고 설비 투자도 꿈틀거리고 있으며 경기 사이클도 이미 저점을 통과했다고 하니 이제 국민들은 체감 경기가 좋아지고 고용이 늘어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소비와 투자가 본격적인 경기회복을 주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사뭇 회의적이다. 우리나라의 민간 소비는 2003년 1.2% 줄었고 작년에는 0.5% 줄었다. 같은 해의 경제성장률이 각각 3.1%와 4.6%였으므로 저축을 많이 했다는 뜻이고 그 결과 민간 저축률은 2002년의 19.6%에서 작년에는 24.0%로 늘어났다.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이유는 신용불량자 양산과 노후생활에 대한 불안감인데 두 요인 모두 단기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이므로 소비가 소득증가율 수준으로 늘어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약간씩 늘어나는 투자는 대부분 수출로 이익을 많이 내고 있는 일부 대기업들이 하고 있는데 이나마도 고용 효과가 크지 않은 첨단업종이나 자동화 설비에 국한되어 있고 고용유발 효과가 큰 투자는 중국을 비롯한 개도국으로 옮겨가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이미 국내 투자를 줄이고 중국 등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하고 있으니 제조업에서 속시원하게 투자와 고용이 늘어나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흔히들 서비스업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현실을 직시해 보면 소매업이나 음식점 등 저부가가치 분야는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영세 자영업자 비율이 나타내 주듯이 이미 과잉공급 상태다. 미국을 보면 금융,교육,보건의료 등 질이 높은 서비스에서 주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금융회사들이 아직도 명예퇴직을 통한 일자리 줄이기를 계속하고 있고 대학교도 조만간 구조조정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칠 것이며 현재의 규제체제하에서 의료기관들이 대폭 늘어날 전망도 희박하다.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고 경제심리를 일거에 호전시킬 수 있는 비방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노·사·정 대타협이다. 노·사·정이 타협을 이끌어 내면 기업의 투자 의욕과 가계의 소비심리가 분출하고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 순위와 국가 신용도는 눈에 띄게 올라갈 것이다. 타협의 구체적 내용을 따지기에 앞서 노와 사가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동질감을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 따를 것이다. 굳이 타협의 방향을 제시한다면 노측은 기업의 번성,임금 안정,생산성 향상을,사측은 고용 안정과 창출,투자 확대를 약속하며 정부는 사회안전망 확충과 투자관련 규제 혁파를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유럽 시스템을 흠모한다. 유럽은 사회 통합과 경제 발전의 두 마리 토끼를 같이 잡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노와 사가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자기 이익을 양보하는 상생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다. 많은 유럽 국가들은 경제가 어려울 때에 노·사·정 대타협으로써 난관을 헤쳐 나갔다. 네덜란드의 바세나르협약,아일랜드의 사회연대협약,스웨덴의 살츠바덴협약,독일의 공동결정제도 등은 그 구체적 내용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노사 안정을 바탕으로 해서 경제를 성장 궤도에 다시 올려놓겠다는 공동의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비정규직 차별 시정을 놓고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 철학과 이념을 둘러싸고 평등주의에 편향된 전교조와 경쟁주의자들간의 대립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그들이 편협한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에 변화하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 양성은 안타깝게도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금융 허브와 경제특구 등을 통하여 지식집약적 서비스산업을 개발해서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의욕적 청사진이 행정당국의 단견으로 인해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한국판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어 내고 훗날 다른 나라에서 소득 2만달러 달성의 성공 사례로서 우리나라를 벤치마킹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