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원 < 삼성증권 사장 > 최근 금융시장에서 투자은행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투자은행을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있었지만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부족했으며,오히려 은행과 자본시장 간의 불균형이 더 심화돼 왔다.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유가증권 인수를 통해 기업과 투자자 간에 자금을 직접 중개하는 역할,기업 인수합병(M&A)이나 지분매각 등의 자문 업무,자기자본을 활용한 직접투자 등이 주요 업무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투자은행업은 외환위기 이후 다양한 금융기법이 도입되는 등 큰 발전이 있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하겠다. 먼저 은행 중심의 금융시장 특성으로 인해 자본시장이 크지 못했고,이로 인해 투자은행이 발달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증권회사는 인수(Underwriting)나 자기매매(Dealing) 같은 투자은행 업무보다는 중개(Brokerage)업무에 의존하고 있다. 이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도 충분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 부가가치가 높은 M&A,지분매각 등의 분야는 다양한 경험과 넓은 해외 네트워크를 보유한 외국 증권사의 독무대가 돼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현 시점에서 투자은행의 활성화가 화두가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국가 전략차원에서 선정된 제조업 분야에 대한 은행의 집중적인 자금지원을 통해 이뤄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인도 등 후발 중진국들이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와 창의력으로 승부하는 '혁신산업'을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육성해야 한다. 위험이 큰 혁신산업에 대한 자금공급은 은행보다는 자본시장에 맡기는 것이 효과적이다. 은행은 속성상 신용 및 담보력이 떨어지는 기업에 자금공급을 하기 어렵다. 또한 자금지원을 받은 혁신기업이 도산해 은행이 부실화되면 국가 전체의 신용체계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혁신산업의 자금 조달은 다수의 투자자에게 위험을 분산하는 방법으로 자본시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와 같이 잠재적 가치는 높지만 위험이 큰 기업과 다양한 투자수요를 갖고 있는 투자자를 효율적으로 연결해 주는 것이 투자은행의 기능이기 때문에 투자은행의 활성화가 필요한 것이다. 우선 자본시장에서 기업의 자금조달이 활성화되려면 은행에 편중된 시중자금이 자본시장에 흘러들어야 한다. 미국 증권시장의 시가총액이 국내총생산(GDP)과 같은 규모인 반면 우리나라는 3분의 2 수준에 불과해 아직 우리 증시의 상승여력은 충분하다. 시중자금이 자본시장으로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금보험제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1인당 5천만원의 예금 보호한도는 과도한 수준으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유발하고 있으므로 선진국 수준으로 축소해야 한다. 또 자본시장에 장기 투자하는 상품에 대해서는 세제 지원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증권업계가 중개,자산관리,투자은행 업무를 모두 취급하는 종합증권사와 특정 업무에 특화된 전업증권사의 구도로 재편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통해 비슷한 사업구조를 가진 증권회사 간의 지나친 경쟁구도가 개선되고 자본시장의 중개기능도 보다 원활해질 수 있다. 셋째 증권회사가 창의력을 발휘해 다양한 투자상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영업과 자산운용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 또 지나치게 세분화돼 있는 업무영역도 넓혀줘야 한다. 최근 정부의 투자은행 육성의지와 증권산업에 대한 규제완화 움직임은 매우 고무적이며 바람직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조만간 한국의 증권회사들이 외국의 투자은행들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