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주 < 삼일회계법인 상임경영자문위원 > 톰 피터스는 "'9·11 테러'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갈파했다. 엔론의 회계 스캔들도 여기에 견줄 수 있는 엄청난 사회 경제적 사건이다. 미국의 일곱번째 기업으로 인정받고,혁신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엔론은 순식간에 몰락하며 미국 자본시장까지 뒤흔들었다. 월드컴 등 대형 회계 스캔들이 겹치며 세계 굴지의 회계법인인 아서 앤더슨도 무너졌다. 회계 투명성이나 경영모델에서 세계표준을 자랑하던 미국의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은 물론이다. 회계 스캔들은 2002년 7월 샤베인-옥슬리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샤베인-옥슬리법은 회계 투명성과 이를 위한 내부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회계정보 생산주체인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최고재무책임자(CFO)에게 민·형사상의 막중한 책임을 부과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의 상장기피와 상장폐지 증가, CEO 해고와 CFO 퇴사가 줄을 잇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물론 이는 회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사회적 비용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IMF사태와 잇달은 회계부정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도 지난해 '외부감사에 관한 법''증권거래법''증권관련집단소송법' 등을 제?개정했다. 이는 샤베인-옥슬리법과 맥락을 같이하는 법들로, 이로써 한국은 미국을 제외하면 회계 투명성을 이유로 집단소송까지 가능한 유일한 국가가 됐다. 회계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관련해 두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나는 미국식 사고에 기초한 한국의 회계개혁 법안이 우리 사회에 적용 가능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한국은 경제적 대외의존도가 70%를 넘고,증시의 외국인 지분율이 40%를 웃도는 전형적인 개방경제형이다. 따라서 싫든 좋든 가장 선진적인 제도로 평가되는 미국식 제도의 도입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다음은 회계 개혁에 대한 준비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다. 회계환경 변화로 우리 기업들이 감당해야 할 위험과 비용이 크게 늘고 있다. 기업 거래의 다양성이나 복잡성으로 재무정보의 오류나 내부 부정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는 반면 경영진의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3백개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집단소송관련 준비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기업은 6%에 불과하다. 65%의 기업은 내부 검토 수준이며 나머지 29%는 아무런 준비조차도 없다고 한다. 기업의 회계 투명성은 경제 사회의 발전 정도나 기업의 능력에 영향을 받는다. 법률이나 정부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IMF사태 이후 우리 기업의 회계 투명성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문제는 방향보다는 속도다. 회계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방향에는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현실에 비춰 회계 개혁법안이 정합성을 갖는지,또 기업이 수용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증권관련집단소송법의 유예를 결정한 것은 이같은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회계 개혁은 아직 우리의 경제 사회적 수준이나 기업 능력에 비해 버거우며,준비도 턱없이 미흡한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정부 국회 기업 사회단체 간에 회계 투명성 확보라는 사회적인 가치와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 및 미국의 사례 등을 감안한 논의가 계속돼야 할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새로운 회계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대응책을 만드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업들은 먼저 효율적인 경영과 펀더멘털의 개선을 통해 적정 수익구조를 창출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함으로써 회계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신뢰할 수 있는 회계정보를 작성해 공시할 수 있는 내부 통제시스템과 감사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법률 및 회계 전문가를 확보해두는 것도 중요하다. 중소기업의 비용을 줄여줄 수 있는 공동시스템을 개발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셋째,원칙과 윤리를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회계투명성 확보를 위한 최후의 보루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