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명 < MK픽처스 사장 shim@myungfilm.com > 지난 4월25일 이 세상을 떠난 고우영 화백은 내 청소년기를 압도한 '문화 영웅'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스포츠 신문에 연재된 '임꺽정'이란 만화로 그의 존재를 안 이후 그의 만화 때문에 어른들이나 보는 신문을 끼고 살았다. '수호지'의 요부 '반금련'과 남자 중의 남자 '무송' 및 그의 착하고 모자란 형 '무대'가 엮어내는 이야기는 어른들의 인생을 훔쳐보는 삶의 교과서였다. '가루지기'는 야릇하면서도 생생한 성교육서 역할을 했고,그에 의해 창조된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 '일지매'의 외형과 캐릭터는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에 대해 갖고 있던 딱딱한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깨주는 역할까지 했다. 고 화백 만화에 중독된 나는 그가 삽화와 더불어 연재한 '미국 유람기'도 빼놓지 않고 보았고 미국이라는 나라도 고우영이란 인격이 필터링해서 전하는 대로 흡수하고 받아들였다. 그의 강한 듯 부드러운 그림체와 파격적이면서도 시적인 언어로 재구성,재해석한 '고전'의 세계는 순수 회화와 정통 문학을 섭렵하면서 얻는 그 이상의 '문화 경험'을 던져주었다. 걸출한 재능의 만화가가 결국 청소년기의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던 셈이다. 그의 만화 보기로 끼니를 거르고,신문 가판대로 달려가고,그가 만들어낸 인물들 때문에 웃고 울며 어느덧 어른이 되었다. 만화가를 인생의 스승으로 삼았다면 아예 직업도 만화가로 선택했어야 더 그럴싸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화 영역인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이 돼 그가 직접 감독까지 한 '가루지기' 영화를 1988년 허리우드극장에서 혼자 봤다. 영화 역시 만화적 표현이 넘쳐나던 것이 기억에 남는데,그의 영화는 다른 분야까지 넘나드는 왕성한 창작욕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고 화백의 죽음을 확인하고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고우영의 무삭제 삼국지'를 다시 보고,그가 과거 심의와 검열에 대한 야유의 뜻을 담아 '무삭제 완전판'이라고 명명한 '열국지' 소식을 들은 게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세상을 등져버린 것이다. 그의 만화와 더불어 어른이 된 내게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말이다. '어느 만화가의 죽음'이 이토록 많은 상념을 갖게 하는 것은 창작자의 가치 있는 저작물이 경험케 한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문화의 세기,대중문화의 영향력이 더할 수 없이 커져버린 지금,나의,우리의 아이들은 또 어떤 '문화 영웅'을 곁에 두고 바라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