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나이가 든다는 것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정끝별 < 시인.명지대 교수 >
나이가 들면서 더 행복해지는 사람들의 유쾌한 통찰을 모아놓은 책을 읽는 중이다.
즐거운 이야기 둘.
국회에서 동료 의원이 지퍼가 열렸다고 일러주자 말년의 처칠은 이렇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죽은 새는 새장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으니까요."
추운 겨울에 모피 코트를 입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던 노부인 앞에 허름한 남자가 나타나 바지를 슬쩍 내리자 일갈하길, "당장 올려요! 감기 걸려서 죽을지도 몰라요!"
전지구적으로 매달 1백만명이 새롭게 예순을 맞이한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도 2000년에 이미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비율이 7.2%를 넘어서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나이가 들기 시작하거늘,정작 '나이가 들었다'는 건 언제부터일까?
사람들은 언제부터 '노인'이 되는 걸까?
한 달이 멀다하고 대대적인 염색작업을 하셨던 쉰살 적의 어머니에게 좀체 희어지지도 빠지지도 않는 튼실한 머리카락을 가진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흰머리 나 좀 주구려."
아버지는 눈썹까지 허연 노신사를 일찍부터 꿈꾸곤 하셨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더 늙어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칠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하고 온갖 모임에 출근하신다.
꽃구경이니 단풍구경이니 노인학교니 소풍이니 계모임이니.
어머니의 이런 나들이를 못마땅해하는 팔순의 아버지는 연일 침대에 누워 TV와 대화중이시다.
나이가 들면서 밖으로 물 새듯 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사리 순처럼 안으로 말리는 사람도 있다.
정년퇴임한 노교수는 일부러 조교를 과 사무실 밖으로 나오게 해 용무를 마치고는 선걸음에 돌아가신다고 한다.
과 교수들은 물론 강사,조교들 모두가 제자들인지라 당신의 방문이 주변을 수고롭게 하지 않도록 배려하셨을 것이다.
다른 노교수는 제자들이 마련한 회갑잔치에 친인척들을 초대해 축의금까지 걷도록 했다고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편의적으로 부리는 사람도 있다.
한 선배는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리는 중인데 가끔씩 만날 때마다 점점 자기 확신에 가득 차 독선적이고 무례해져 간다.
다른 선배는 이런저런 이유로 직장을 그만 두고 이혼까지 하더니 공술에 취사에 강짜를 부리다 이튿날이면 사과하느라 분주하다.
나이에 권력이 더해지면 폭력적이기 쉽고 나이에 관계마저 잃게 되면 비루해지기 쉽다.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
전기장판이 수시로 필요하고,내려가는 계단이 무섭고,뭔가 자꾸 보인다고 우기고,평가나 판단에 망설임이 적어지고,관심 이외의 것에 인색해지곤 한다.
때로는 상대방이 긴장하지 않도록 '일부러' 조금 망가지기도 하고,겁이든 불안이든 근심이든 부끄러움이든 가슴을 조이던 것들이 적어지고,세상이 무섭다는 걸 안다.
세상이 무서운 만큼 나도 질기다는 것도 안다.
어떻게 나이를 들어야 할까.
주변을 둘러보면 간혹 멋지게 나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
'아,나도 저렇듯이…' 싶다가도 다른 자리에서 얘기를 들어보면 또 다른 모습이기 일쑤다.
나이가 들면 넓어지거나 가늘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제발 몸은 가늘어져도 마음만은 가늘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더 욕심스러운 바람은 "나이가 드는 것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나이가 드는 줄도 몰랐고,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매달 예순을 넘어서는 1백만명에게 나이 든다는 게 하나의 특권이 될 수는 없는 걸까.
물질로 혹은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노인들의 연륜이 의미가 있는 사회를 꿈꾸어보는 아침이다.
호메로스가 서사시를 노래한 것은 나이가 들어 시력을 잃은 후였고,아이스킬로스가 최고의 비극을 쓴 것도 예순을 넘기고 나서였으며,소포클레스는 아흔이 다돼서 최고의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들처럼은 아니래도 '예순을 넘기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나이듦을 생각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
나이듦을 준비하는 자에게 '의미있는' 노년이 펼쳐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