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은행 공익경영 요구는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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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 < 딜로이트컨설팅 파트너 >
신문지상에 '금융대전'을 알리는 경계경보가 요란스럽다. 지난해 씨티뱅크가 한미은행을 인수하고,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 제일은행을 인수하면서 국내 금융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세계금융계를 주름잡는 거대기업에 맞서 경쟁해야 할 국내은행들은 대응전략 수립에 분주하다. 일부에선 외국자본의 국내 금융산업 지배가 시작됐고, 멕시코와 남미의 사례를 볼 때 국내은행들의 생존이 쉽지않을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개방환경은 우리 금융산업이 한단계 발전함은 물론, 국내시장에 머물러 왔던 토종은행들이 글로벌시장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통산업의 사례를 보자. 백화점 중심이었던 우리나라 유통업은 1990년대 후반부터 할인점이란 신업태의 성장으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국내 유통시장이 개방되면서 월마트, 까르푸, 코스트코 등 글로벌 기업이 국내시장에 앞다퉈 진출했고 글로벌 소싱능력을 갖춘 이들의 시장진입은 국내 유통기업에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외국자본의 국내유통산업 지배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이들에 맞섰던 이마트, 롯데마트, 하나로마트 등 국내기업의 시장지배력은 더욱 강화됐고, 자신감을 얻은 국내 유통기업은 중국에까지 진출, 전세계에서 모여든 글로벌 유통기업들과 우열을 다투고 있다.
가전산업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주부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제너럴일렉트릭(GE), 월풀 등 글로벌 브랜드가 진출했을 때 우리나라 가전의 앞날을 어둡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수시장을 놓고 벌인 경쟁에서 삼성과 LG는 당당히 승리했고, 여기서 축적한 기술력으로 이제는 가전산업에서 글로벌 톱을 지향하고 있다.
휴대폰 절대강자였던 모토로라와 맞붙었던 국내 휴대폰 생산기업은 외산제품 일색이었던 내수시장을 확보했음은 물론 휴대폰 최대생산국으로 발전했다. 개방과정에서 항상 우려가 컸지만 우리 기업들의 대응은 탁월했다. 그리고 글로벌 거대기업과 내수시장에서 경쟁하면서 축적한 기술과 경험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금융산업도 마찬가지다. 국내은행이 글로벌 금융기업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IMF이후 기초체력을 길러왔고, 경쟁 속에서 축적한 경험과 고객기반은 유지되고 있다. 특히 IMF이후 5대 시중은행이 퇴출되는 재편과정에서 살아남은 일부 은행은 은행산업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외국계 은행의 공격을 이겨내면서 우리나라 금융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나아가 진정한 글로벌 플레이어로서 도약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것들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시장에 맡기라'는 원칙이다. 외국계 은행은 우리나라의 공익에 봉사하고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 것이다. 당연히 수익성이 우선이고, 수익성이 높은 고객에게 집중하는 '선별금융'(Cherry Picking) 전략은 기본이다.
그러나 이들과 맞서 싸울 국내은행은 자칫 수익성과 공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라는 무리한 요구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은행이 중소기업 대출과 서민대출을 등한시한다는 기사는 신문지상의 단골메뉴이다. 이미 철저한 산업원리가 적용되고 있는 은행산업에 이러한 요구는 합리성이 결여된 것이다. 위험관리가 핵심인 은행산업에서, 고위험 대출을 강요당하는 은행의 생존이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책당국의 편의성, 언론의 선정성, 일부 시민단체의 몰이해 때문에 빚어지는 이런 요구가 계속된다면 국내은행은 외국계 은행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할 수밖에 없다.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가진 자질의 우열이 아니라, 갖고 있는 자질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달려있다고 한다. 국내은행이 가진 자질은 외국계 은행보다 열등하지 않다. 그러나 그 자질을 잘 활용하게 하는 기본조건은 '시장원리'의 공평한 적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