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과 '파리의 연인'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TV 드라마다. 앞의 것은 온갖 역경을 견디고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임금의 주치의 자리에 오른 조선조 여인, 뒤의 것은 착하고 솔직 털털한 성격 하나로 재벌 2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현대판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그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장금이'와 '애기'는 비슷하지 않다. 가치관과 지향하는 바도 다르고 행동과 태도도 다르다. 그렇다면 두 가지에 함께 열광하는 한국 여자들의 현주소는? 국내에선 근래 '여풍(女風)이 거세다'고 야단이다. 연초 임용된 예비판사 중 여성이 절반 정도였다는 걸 필두로 여풍에 관한 뉴스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실제 사법고시 여성 합격자는 1990년 4%에서 지난해 24.3%, 행정고시 합격자는 90년 1.7%에서 지난해 40%에 육박할 정도가 됐고 온갖 부문에서 여성 1호가 탄생하면서 금녀구역 또한 거의 허물어졌다. 각종 수치만 높아졌으랴. 곳곳에서 여성들이 요직에 발탁되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게 "요즘엔 여성을 잘 모셔야지 안 그러면 큰일난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중년 남성들 사이에선 "아침에 나오려면 아내가 잠에서 깰까봐 까치발로 걷는다" "이사할 때면 아내가 아끼는 강아지를 꼭 껴안고 있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이다. 보도나 이런 얘기들로만 보면 그야말로 '여성 천국' 내지 '여인 천하' 같다. 그러나 현실은? 수십 대 1의 경쟁을 뚫고 입사했더니 자판기가 있는 데도 커피 심부름을 떠맡기고, 회식 중 중간 간부가 술을 강권하는가 하면 술 취했다는 핑계로 몸을 더듬는다는 마당이다. 결혼하면 육아와 가사 때문에 이중삼중으로 고달프다. 육아 휴직제도가 있다지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스위스의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여성의 권리:글로벌 남녀 불평등 조사' 보고서에 한국의 남녀평등 성취도가 58개국 중 54위로 중국 일본은 물론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보다 뒤진 걸로 나타났다고 한다.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 3월 한국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13개국 중 꼴찌라고 보도했다. 대장금을 꿈꾸면서 애기에 빠져드는 한국 여자들의 현주소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