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지난 5월7일 오후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졸업식을 구경했다. 나 자신 미국의 두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졸업식 구경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선 미국 대학의 졸업식은 생각보다 훨씬 장중하게 진행됐다. 아마 졸업생 거의 전부가 참석한 듯 거창한 농구장의 바닥과 관람석 일부가 가운을 입은 졸업생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졸업생보다 훨씬 많은 학부모와 가족이 농구장을 가득 채웠다. 평생을 대학 교수로 지내고 방금 정년퇴임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미국 대학의 졸업식이 부러웠다. 산만하기 짝이 없는 우리 졸업식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총장(아담 허버트)의 졸업식 강연이었다. 사회학자 제임스 스튜어트 밀에서 시작해 경영학의 피터 드러커를 거쳐,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을 말하고, 영국 시인 테니슨과 셰익스피어까지 인용한 그의 연설은 몇 차례 박수를 자아내며 진행됐는데, 특히 그가 길게 인용한 책은 자신이 '지난 주' 읽었다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최근작 '세상은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였다. '세상은 평평하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눈이 번쩍 띄는 말이어서, 나는 당장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떠올렸다. 하지만 졸업식 후 알아보니, 이 책은 4월에 출간돼 이미 베스트셀러가 됐다는데, 정말로 할인매장에 쌓여있었다. 그 뜻도 지구가 둥글지 않다는 말이 아니었다. 세상이 평평한 컴퓨터 모니터에서 좌지우지된다는 표현임을 알 수 있었다. 어디 컴퓨터 모니터만 평평한가? 정보화사회의 진행 속도가 빨라지면서 세상은 점점 높낮이가 적어지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을 가진 인도와 중국도 경제 발전이 눈부시게 진행되면서 중산층이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프리드먼은 지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세상은 평평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나라 사이에서도 높낮이는 상당히 줄어들었다고 할 만하다. 과거에는 지구상의 나라와 민족들은 그 지역의 기후와 지리적 특성에 따라 국가와 개인의 운명이 좌우됐다. 이제 그런 시대는 갔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저자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닐 뿐 아니라,미래학자도 사회학자도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프리드먼(52)은 백악관 출입기자로, 그리고 중동 몇 곳의 특파원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미 책을 몇 권 냈고, 퓰리처상을 세 번 받았다고 소개돼 있다. 지난번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The Lexus and the Olive Tree, 2000) 역시 이번 저서와 연결된 책으로 세계화의 부작용을 경고한 작품이다. 그에 의하면 세계화란 시장과 국가와 기술이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통합되는 과정이다. 그 결과 이제 개인,기업,국가들은 더 멀리, 더 빠르게, 더 깊이, 그리고 더 값싸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됐다는는것이다. 그런 가운데 제조업을 도맡게 된 중국에서, 그리고 못지 않은 인구를 가진 인도에서도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과연 이들 거대한 세계의 중산층을 지탱시켜 줄 정치ㆍ사회구조는 지금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은 보다 빨리 적응훈련을 하고 변화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그는 걱정한다. 한국은 특히 그렇지 못하다. 아직도 우리는 민족과 언어 정도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닌가 걱정스럽다. 인디애나대학 총장이 이 책을 인용한 것은 이 책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풍요 속에 야망을 잃어가는 미국 청소년들에게 미국의 영광을 지켜가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이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프리드먼은 지적하고 있다. 총장은 졸업생들에게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흥미롭게 느껴진 사실은 미국 사회는 우리와 달리 지식사회의 담쌓기가 그리 심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국제문제 전문 신문기자가 정보화 사회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유수한 대학의 총장이 졸업식 식사에서 신문기자의 책을 길게 인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