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 서울대교수·정치학 > 요즈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에 대하여 계량화하고 또 이를 국제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한창 유행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도덕지수'나 '부패지수','투명성지수' 등의 용어에 대하여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런데 아직까지 '자율성지수'가 없는 걸 보니,아직까지 자율이라는 것에 대한 가치가 중요시되지는 않고 있는가 보다. 또 자율이란 것은 순전히 말 뿐인 '유명론(唯名論)'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고등학교에 '자율학습'이란 것이 있지만,실제로는 '타율학습'이다. 선생님이 지키고 감독하는 학습이 어떻게 '자율학습'이란 말인가. 자율이란 모름지기 자기결정,자기입법,자기규범에 관한 것으로 외부의 간섭과 반대개념이다. 선의의 간섭이라도 자율을 훼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정부가 자율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것이 '자율학습'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기업과 대학,또 사학재단에도 자율을 주었다고는 하는데, 영양가가 전혀 없는 자율일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얼마 전 "시장에 권력이 넘어갔다"고 공언했지만, 출자총액제한제는 버젓이 살아 있어 기업자율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또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여 사학재단의 자율성을 거의 없애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한편 정부는 틈만 나면 대학의 자율권을 존중한다고 해왔는데,막상 학생선발권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한 대학이 무슨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인가. 또 얼마전 법을 만들어 국립대 총장을 직선으로 뽑을 때는 지역선거관리위원회의 감독을 받게 했으니,대학이 어떻게 자율성을 누리는 곳인가. 이러다 보니 모두가 의존적 존재가 되고 정부는 '빅브라더'가 된다. 물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는 것"처럼, 정부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자율권을 주었더니 그 자율권을 남용한 사례가 많고, 기업의 불투명경영,사학재단비리,대학총장선거를 둘러싼 잡음이 그 증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자율이란 정태적 개념이 아닌 성장적 개념이다. 무릇 모든 생물이 성장하는 것처럼,자율도 성장하는 가치로서 그저께보다 어제,어제보다 오늘 더 성숙할 수 있다. 어린애가 하루아침에 어른이 될 수 없다면,온전한 자율성 행사에도 시행착오가 있고 이 과정을 거처 온전하게 영글게 마련이다. 그런데 정부의 태도는 자율성 행사에서 나오는 잘못이나 시행착오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으로 타율의 규범을 들이대며 자율의 싹을 싹둑 자른다. 그러고 보니 정부가 간섭과 타율의 명분을 찾는 것도 가지가지다. '개혁'의 이름을 들먹이기도 하고 '정의'의 이름을 동원하기도 한다. 혹은 '효율성'의 이름으로 개입하고 심지어는 '자율'의 이름으로 간섭하는 기막힌 일도 벌어진다. 이 때 흥미로운 것은 항상 각 행위 주체들에 "자율을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는 점이다. 자율이란 스스로 하는 것인데,그 자율을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면 타율 속의 자율, 즉 '타율적 자율'이 되니,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문제는 이런 식으로 정부가 접근하니 모든 행위주체가 정부의존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나마 정부가 간섭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종교계가 유일하다. 그래서 종교계가 한국에서는 자율성의 유일한 보루고 나머지는 정부의 '식민지화'가 된 것이다. 이런 정부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부장적 후견인'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말하는 것처럼,백성들은 양떼가 되고 정부는 목자,즉 양치기가 된다. 언제나 양치기가 인도하는 대로 양떼가 따라가는 목민(牧民)의 정치,그것은 군주정일지언정 민주정의 모습은 아니다. 양떼처럼 자율성이 없는 시민들이 어떻게 자율적으로 대통령을 뽑고 또 국회의원도 뽑을 수 있는가. 지금 '개혁'의 이름으로 각종 영역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참여정부가 새겨 들어야할 말이 있다. 사람들이 독립적일 때 자기 자신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