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미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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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월 선생이 작사한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는 지금도 애창되는 대표적인 가요다.
6ㆍ25 한국 전쟁 중 남쪽의 애국지사들과 지식인 그리고 청장년들이 줄줄이 묶여 북으로 끌려갈 때 가족들과의 생이별을 그린 이 노래는,제목 그대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이 처럼 슬픈 역사를 간직한 '미아리'는 1970년대 초 서울역 앞 양동 등지의 윤락녀들이 단속을 피해 이 곳에 모여들면서 '미아리 텍사스'라는 집창촌으로 변모됐다.
'텍사스'라는 말은 당시 유행하던 서부활극에서,총잡이들이 말에서 내려 1층 바에서 술을 마시고 2층에서 윤락녀들과 함께 관계를 맺는 상황을 빗대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미아리 근처에는 수많은 점집과 철학관이 들어서면서 '미아리에서 자리깐다'라는 말도 생겨났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인 공동묘지가 조성되기도 했다.
이러 저런 이유로 해서 미아리는 이별과 눈물,환락,운명을 뭉뚱거리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미아리(彌阿里)는 이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지명풀이를 하면 넓은 언덕이란 뜻인데,고려 말기 이 곳의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을 그려 '미아'로 명명됐다고 전해진다.
미아리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른 지명과는 달리 유난히 설(說)이 분분하다.
지금 미아 7동 불당골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미아사'에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넘어왔다 해서 '되너미고개'라고 하는데 이 고개를 일명 미아리고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요즘 미아리의 명칭을 둘러싸고 서울시 지자체들끼리 때아닌 분쟁이 일고 있다.
성북구가 미아리라는 이름이 한 많은 고개,집창촌의 의미를 풍긴다며 개명을 발표하자,실제 미아동의 행정지명을 갖고 있는 강북구가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사전협의는 고사하고 괜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환기시켜 주민들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는 주장이다.
아직도 윤락녀가 말썽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미아리인근은 아파트촌으로 몰라보게 변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시비가 세워지고,인근 정자와 성곽도 새롭게 단장됐다.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겠다는 게 당국의 구상이다.환경이 변하면 이미지가 변하다는 점을 감안해 개명 문제는 신중해야 할 것 같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