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언변이 뛰어난 편이다. 어려서부터 논리적인 사고와 토론법을 배우는 탓이다. 미국에서 말로 먹고 사는 코미디언들이나 CNN의 래리 킹 등 유명 방송인 중 상당수가 유대인이란 것은 그런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다. 유대인들이 어쩌다 말을 더듬거릴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필시 무슨 이유가 있다고 보면 될 정도다. 대표적인 인물이 앨런 그린스펀이다. 뉴욕에서 유대인으로 자란 그는 지난 18년 동안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공식 석상에선 늘 어눌(語訥)하게 말한다. 주위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도록 말끝을 흐리고,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처럼 몇번을 곱씹어 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알쏭달쏭'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사석에서 그와 대화를 나눠본 사람은 명료한 표현 방식에 놀란다고 한다. 어떤 질문에도 먼저 결론부터 명쾌히 얘기하고 나중에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 논리적인 화법을 구사한다는 것.공식 석상에서의 '어눌 화법'과는 판이하게 다른 셈이다. FRB 의장이 된 뒤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말끝을 흐리는 방법이었다는 그린스펀의 농담은 중앙은행 총재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난주 우리 외환시장은 홍역을 앓아야 했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국내외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탓이다.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그의 발언이 보도되면서 원화가치는 급등했고, 외환당국은 급등한 원화를 돌려놓느라 약 10억달러를 투입했다는게 시장주변의 얘기다. 한은 총재 한마디가 1조원의 가치가 있다는 비아냥이 나온 것도 그래서다. 사건이 불거지자 한은측은 FT가 인용을 잘못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박총재의 많은 얘기 중 필요한 부분만 보도한 것에 대해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신문기자 입장에서 보면 그런 점을 감안하지 못하고 인터뷰를 한 박 총재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박 총재는 작년말 국정감사 때 그 말 많은 국회의원들로부터도 "말이 너무 많고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니 총재의 메시지를 관리할 수 있는 태스크포스를 만들라"는 충고를 받은 바 있고 보면 언제까지 언론만 탓하긴 힘든 노릇이다. 우리나라에서 말이 문제 되는 공직자가 비단 한은 총재만은 아닌 것 같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가 연일 화제에 오르더니 이제는 총리도 그 대열에 오른 느낌이다. 국가기밀 중의 기밀이라는 대통령의 건강 상태까지 기자들 앞에서 마음놓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더 이상 다른 예를 들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지위가 높은 공직자들이 말을 많이 하고 싶은 속마음은 뭘까. 혹시 많은 정보와 정책 방향을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국민들의 '무지(無知)'를 일깨우려는 책임감에서 일까. 분명히 말하지만 국민들은 그런 공직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우수하다. 어떤 조사를 해봐도 민간부문의 경쟁력이 정부부문보다 훨씬 뛰어나게 나타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공직자들은 국민들에게 말하려 들지 말고,국민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공직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치밀하고 세련된 정책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봉사하겠다는 겸손한 자세다. 공직자들의 절제되지 않은 말이 자꾸 구설(口舌)에 오르면 스스로 신뢰를 잃을 뿐 아니라 나라를 이끄는 데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육동인 논설위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