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해빙무드로 접어들 것 같았던 한·일관계가 다시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 분쟁으로 악화일로를 걷던 한·일관계는 내달 말로 예정된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고비를 넘기는 것 같았으나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의 '부적절한 발언'을 계기로 다시 경색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정부가 28일 야치 차관의 전날 해명에 대해 "우리 정부를 폄하하고 동맹갈등을 조장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그의 언사에 대한 일본측의 조치가 유감 표명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것은 사실상 상대방 외교당국자 중 하나인 야치 차관을 문책하라는 요구로 해석된다. 외교적 언사로서의 '유감'표명은 비록 그 강도는 떨어지지만 '사과'에 가깝다. 또 야치 차관이 일본 외교 최고책임자인 외상으로부터 '말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았다고 직접 고백한 부분은 고위급 외교관으로서는 모욕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보다 강한 조치를 원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외교부는 공식적으로는 이번 논평이 문책 요구는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야치 차관의 해명이 미흡하고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추가로 어떤 조치를 취하라는 것은 아니다"며 "부적절한 발언에 대한 해명까지도 미흡했던 그와 일본 정부를 앞으로 지속적으로 주시해 나가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야치 차관의 발언을 개별사안으로 다루지 않고 일본 내 책임있는 인사들의 역사왜곡 발언들과 함께 종합적으로 고려해 앞으로 한·일관계 방향에 대해 판단하겠다"고 밝힌 것 역시 일본의 자발적 조치를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의있는 행동이 없으면 차제에 대일정책의 기본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결연한 각오를 내비친 것이다. 한·일관계가 경색될 조짐을 보임에 따라 내달 말로 예정된 한·일정상회담 개최 여부도 불투명해졌다. 특히 야치 차관의 발언을 한·일관계 방향의 판단 기준으로 삼겠다고 한 만큼 최악의 경우 무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일단은 정상회담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야치 차관 발언에 대해 일본측이 어떤 조치를 취하는지,또 그에 따른 한국 내 여론이 어떻게 흐르는지에 따라 이 같은 입장은 언제든 변화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