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청계천 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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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문 안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청계천은 도성의 하수도나 다름없었다.
조선시대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은 온갖 오물을 이곳에 내다 버렸고,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은 청계천 다리 밑에 아이를 버리기까지 했다.
서울이 현대 도시로 정비되면서는 오ㆍ폐수가 흘러들고 쓰레기가 쌓여 도무지 코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깨끗한 내'라 해서 붙여진 청계천(淸溪川)이란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더러운 개천은 복개공사로 감추어졌고 그 위에는 야심만만한 고가도로가 만들어졌다.
3ㆍ1빌딩과 다정히 포즈를 취한 청계고가도로와 삼일고가도로의 사진은 해외 홍보용으로 쓰이기 일쑤였고, 이 땅의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청계천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가장 아름답다는 수표교는 장충공원으로 옮겨졌고,제일 넓은 다리인 광통교는 모형으로 만들어져 인근에 남겨졌다.
옛 문헌에는 청계천이 명당수(明堂水)라 기술돼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강물은 거의 대부분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데,이 하천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그 물기운이 가히 명당수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홍수가 나면 하천이 범람해 역대 임금들은 둑을 쌓고 폭을 넓히면서 치수에 힘썼다.
콘크리트를 이고 누웠던 청계천이 복원사업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어제는 시험 통수식을 무사히 끝냈다.
현재 공정률이 96%인 청계천이 오는 10월 1일 완공되면 하루 12만t의 물이 도심을 흐르게 된다.
빨래하는 아낙네들과 물장구치는 꼬마들의 모습은 아니라 해도,물고기들이 노니는 여유로운 정경과 맑은 물을 내려다 보는 시민들의 밝은 표정은 생각만 해도 뿌듯하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결정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교통문제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다.
인근 상인들의 생계문제도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자연이 살아 숨쉬는 도시를 만들자는 합의가 결국 청계천을 소생시켰다.
북악과 인왕,남산 등 여러 골짜기의 물이 청계천으로 모아져 한강으로 흘러갔 듯,모든 시민들의 이해도 한 곳으로 모아져 갈등 없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수도로 비하되고 흉물로 치부되던 청계천은 이제 역사책에서나 찾아야 할 것 같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