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는 '블루오션 전략'이 기업인들 사이에 화제다.


경쟁이 심한 기존의 레드오션 시장에서는 성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존 제품 서비스와 완전히 차별화된 새로운 제품 서비스를 만들어 독점 이익을 만들어 내자는 이야기이다.


맥주전문점 '쪼끼쪼끼'의 김서기 사장(46)은 블루오션을 만들어 성공한 사업가이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동네 상권에 맥주전문점을 깔아 6년만에 600개의 가맹점을 거느린 국내 굴지의 맥주전문점을 일궈냈다.


지난 99년 호프집이 고작인 수도권 주택가에 첫 점포를 열자 주위에서 곧 망할 거라고 수군됐지만 그는 빠른 속도로 주택가 시장을 석권했다.


"성공하려면 뭔가 튀는게 있어야 하잖아요.지역도 지역이지만 술과 안주도 차별화해서 안주는 300원짜리를 개발하고 최고 2만CC까지 들어가는 술통을 개발했어요."


김 사장은 장사도 변화를 줘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사에 눈 뜬 청소년 시절


부산 동래에서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사장은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다.


"중고 시절엔 신문을 배달하거나 고물을 주워다가 수집상에게 팔기도 했어요.


용돈을 벌면서 장사에 눈 뜬 것입니다.


20살이 되면서 시외버스 행상을 했는데 그게 돈 버는 법을 알게 해준 좋은 경험이 됐지요."


버스행상은 일종의 만물상이었다.


이태리타월,병따개,귀 후비개,손톱깎이,빗 등 생활잡화들을 세트로 묶어 1000원에 팔았다.


벌이가 좋아 하루 매출 10만원 이상을 거뜬히 올렸다. 회사원 월급이 10만원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한달 자릿세로 100만원을 냈지만 매출의 절반이 마진이어서 수익이 짭짤했다. 요령도 생겨 공급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물건을 조달해 마진폭을 넓히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장사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학을 나온 행상 한 사람이 버스 안에서도 백과사전 책 카메라 같은 고가품을 파는 거예요. 그 때 그 양반한테 배운 게 장사도 연구하고 변화를 줘야 성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 사장은 그 때부터 행상들의 장사 관행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행상들은 보통 승객 2~3명 뿐인 버스에는 오르지 않는데 그는 주저없이 들어갔다. 승객 수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물건을 설명하니 손님들이 오히려 미안해서 하나씩 사주었다.


◆험난한 자기 사업의 길


군대를 마친 그는 행상을 직업으로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헬스클럽사업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운동도 좋아했다. 월 2만원 내는 회원이 200명이 넘어 수입도 짭짤했다. 체육관 운영에 재미를 붙일 무렵 한 선배가 동업을 제의해왔다.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담는 나무상자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납품하면 대박이 터진다는 것이었다.


체육관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매각대금 절반을 투자했다.


하지만 사업은 선배의 말처럼 풀리지 않았다. 사업성을 충분히 따져 보지 않은 게 후회막급했다. 결국 돈만 날렸다. 실의에 빠져 1년 넘게 등산을 하면서 방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 정상에서 문득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어차피 무일푼으로 시작한 인생인데 체육관을 경영하면서 아는 사람도 많이 생겼고 건강한 육체도 있는데 걱정할 게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길로 집 전세금을 받아 학사주점을 차렸습니다."


대학촌의 지하 1층에 차린 20평짜리 주점(선비촌)은 처음엔 파리만 날렸다.


다른 가게가 미어 터지는 걸 보니 더욱 화가 났다.


고민하다가 전자상가에서 구한 노래방 기기를 한대 들여 놓았다. 그 뒤부터 점포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술이나 안주를 푸짐하게 줘 남는것은 별로 없었으나 김 사장은 손님을 끄는 법을 알게 됐다.


자신이 생긴 그는 90년 부산에서 가장 번화한 서면으로 진출했다.


집을 팔아 마련한 3천만원으로는 임차보증금과 권리금 대기에도 빠듯했다.


인테리어와 집기비가 문제였다.


그는 무작정 건물 주인을 찾아갔다.


장사를 잘해 건물가치를 올려 놓을 테니 인테리어와 집기비를 빌려달라고 통사정했다.


주인은 처음엔 미친 사람 취급했다.


한 달 동안 매달리니 승낙했다.


가게 이름을 '영타운'으로 정하고 차별화 방안에 골몰했다.


"술집이 수백개 있는데 성공하려면 뭔가 튀는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우선 술과 안주를 차별화해서 안주는 300원짜리를 개발하고 최고 2만㏄까지 들어가는 술통을 내놨습니다." 5000cc는 아크릴통,8000cc는 투명 양동이를 사용하는 식이었다.


젊은이들의 유동인구가 넘쳐나는 서면에서 소문이 금방 났다.


잔도 여느 맥주잔과 달리 여자의 상체를 본뜬 비너스잔을 따로 주문해 만들었다.


메뉴표에는 2000cc를 '기본',5000cc를 '위협',8000cc를 '횡설수설',1만cc를 '비몽사몽'이라고 이름붙였다.


매달 1000만원 이상 순익이 남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 건물주인이 바뀌는 우역곡절을 겪은 끝에 이 건물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전 층을 맥주점으로 꾸며 운영했다.


맥주생산업체가 공급하는 나무통 50개를 하루에 다 팔아치웠다.


이 일대 맥주집들의 10배가 넘는 물량이었다.


◆프랜차이즈 사업가로 변신


하루 50통,100만cc를 파는 맥주 거상이 된 그는 건물 주인에게 건물을 팔라고 제안했다.


그런데 협상 중 오해가 생겨 건물주가 다른 사람에게 건물을 매각,점포문을 닫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그 일로 그는 사업지를 수도권으로 옮기게 된다.


당시 주택가에는 맥주와 안주 몇가지로 장사하는 영세 호프집이 전부였다.


서울 성내동 뒷골목 한적한 곳에 쪼끼쪼끼 1호점을 차렸을 때 주위 복덕방 아저씨들이 "부산 촌사람이 서울 물정을 모르고 헛발질을 하는구먼"하고 혀를 찼다.


김 사장이 지은 브랜드만 해도 모두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갔어요.


당시에는 맥주집 하면 오피스가에서 직원들 회식만 떠올렸지,이웃이나 가족끼리 가볍게 한잔 할 사랑방 같은 곳은 없었습니다.


저는 된다고 확신했지요.


2001년 복분자맥주 같은 웰빙 맥주를 내놓으면서 가맹점이 급증했고요,한·일 월드컵이 끝나면서 점주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지요.


원하는 사람 다 내주었으면 지금 1000개는 넘었을 겁니다."


2004년 그는 꿈에 그리던 사옥을 완공했다.


맨 주먹으로 출발,대형 맥주점 주인을 거쳐 프랜차이즈 기업가로 변신한 그가 또 다른 업종에서 블루오션을 발견할지 주목된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