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올해 공기업들에 던져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수수께끼를 내 못맞히면 죽였다는 스핑크스의 전설처럼 사활을 건 긴박감 속에 공기업들은 생존의 해답을 찾는 데 골몰해 있다.힌트는 주어져 있다. 다름 아닌 '혁신'이다. 단순히 외형만 바꾸는 것이 아닌 조직원들의 마인드까지 속속들이 개혁하는 '내적 혁신'이 요구되고 있다.



◆무한 대경쟁 예고


지난 5월 말 현재 국내 공기업은 500개를 훌쩍 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정부가 경영혁신 대상으로 관리하는 공공기관이 212개다. 한국전력공사 석유공사 토지공사 등 정부지분이 50%를 넘는 투자기관이 14개, 국민연금관리공단 등 정부가 일정 지분을 출자ㆍ출연한 산하기관이 88개에 이른다.


이 밖에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정부 출연연구기관 47개, 한국산업은행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정부 부처가 중점 관리하는 기관 64개 등이 있다.


정부의 과보호와 규제의 우산 아래 공기업들이 '경쟁'을 잊은 동안 외부환경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기업 경쟁무대는 세계로 넓혀졌고 개혁ㆍ변화ㆍ혁신에 대한 요구가 광풍처럼 몰아쳤다. 외환위기를 겪은 민간기업들이 유연한 혁신 마인드로 무장하고 발빠르게 변신하는 동안 정부의 공기업 정책도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성과 평가 또한 엄격해졌다. 기획예산처는 올해 13개 정부투자기관 이외에도 88개 산하기관 경영실적을 평가해 낱낱이 공표한다는 방침이다.


고객만족도 조사도 종전 13개 투자기관과 3개 민영화법 대상 기관에만 국한하던 것을 올해부터 산하기관 88개, 출연연구기관 47개 등 207개 기관으로 확대 실시하기로 했다. 경영 혁신성과가 좋으면 보상을 철저히 하되, 반대로 혁신 성과가 부진한 기관에 대해서는 기관장 해임과 함께 기관 구조조정도 불사한다는 지침까지 내려진 상태다.


여기에 중장기적으론 공공기관 이전이라는 초대형 변수도 예고돼 있다. 최근 정부의 공공기관 이전계획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해당 기관들은 그동안의 터전을 옮겨 새출발할 준비까지 해야 한다.



◆도덕 재무장 요구


최근 잇따라 불거진 행담도 개발(도로공사), 러시아 유전개발(철도공사) 등 공기업이 연루된 의혹은 정부의 공기업 혁신 드라이브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도입한 최고경영자(CEO) 공모제도 잇따라 2차,3차 재공모의 진통을 겪고 '낙하산' 시비도 끊이지 않는 등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이에 대해 야당 등은 △예산낭비 △방만 경영 △부정 비리 △낙하산 인사 △전관예우 관행 △고액연봉 △산하단체간 유착 등을 들어 공기업 모럴 해저드를 비판하고 있다.


정부도 공기업 도덕성 재무장 필요성에는 이견이 없다. 예산처 관계자는 "도덕성 논란을 불식시키지 않고는 국민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며 "인사관리 인건비 관리 반부패 경영 예산운영 등 4개 분야를 전 기관 공통과제로 선정하고 이행여부를 중점 관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기관별로 서로 다른 예산 및 회계제도를 통일해 투명성을 높이는 한편 경영정보도 광범위하게 공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연말까지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DART) 시스템을 벤치마킹해 공공기관 경영정보를 온라인을 통해 상세히 제공할 계획이다.공기업 기능, 예산운용, 성과가 모든 국민 앞에 드러나는 셈이다.이에 따라 공기업들은 윤리경영과 투명경영이라는 또다른 숙제를 안게 됐다.



◆혁신만이 살 길


이처럼 대외환경이 급변하고 정부 등이 '혁신압박' 강도를 높이면서 공기업에도 예전처럼 탈만 없으면 된다는 '무탈주의'로는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자각이 뿌리내리고 있다.밖으로부터 혁신이 강요되는 와중에 안에서의 자발적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전기안전공사는 최근 '찾아가는 서비스'를 갖추고 고객과의 거리를 좁혔다.업무 중요성에 비해 친숙함이 뒤떨어진다는 자기반성에서다.이에 따라 빌딩 내부의 변압기나 전원차단장치, 주택이나 가로등의 누전차단장치, 노래방 유흥주점 등의 전기설비 등에 대한 상시 리콜서비스를 실시했다.휴일이나 야간에 정전 누전 등으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전화하면 언제라도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는 '전기안전 스피드 콜(1588-7500)'제도도 호응을 얻고 있다.


수출보험공사는 수출 중소기업들의 환위험 관리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작년 말부터는 환변동보험 보험료를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인하했다.수출보험공사가 판매하는 환변동보험은 중소 수출기업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금융상품으로 꼽힌다.


농업기반공사의 경우 '공사가 망하는 길'이라는 역발상 토론회를 통해 조직원들이 자발적인 혁신의 중지를 모아 주목받았다.5월초 예산처 주최로 열린 '공공기관 CEO 혁신토론회'에서 우수사례로 선정돼 발표자로 나섰던 안종운 농업기반공사 사장이 밝힌 '혁신론'은 공기업 혁신의 핵심을 담고 있다.


"공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사고를 탈피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존재가치를 잃은 기업은 도태되는 게 마땅하지요.혁신이란 다름아닌 '존재의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존재의 이유’를 생산하기 위한 공기업의 노력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