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친구들과 함께 쌀을 씻어 밥을 짓고 형님은 돼지를 잡은 뒤 반찬거리를 준비하십시요". 여명이 밝아오는 지난 주말의 이른 새벽시간..경남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 당산마을에 살고 있는 중.장년 남자들의 서투른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날 여왕이 된 35명의 아내들을 포함한 39가구 80여명의 주민들이 먹을 음식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마을 남자들은 해마다 모내기와 고랭지 채소 파종이 끝나는 시기에 날을 잡고 마을 인근 달음제 계곡에서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부녀자들을 대접하는 `여왕의 날' 행사를 열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이 많은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열어 오던 이 행사는 70년대 중반부터 마을의 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30여년 가까이 이어지는 전통행사가 돼 버렸다. 힘든 농사일을 하는 부녀자들의 고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날 하루만큼은 밥짓기, 빨래하기 등 온갖 잡다한 일은 모두 남자들 차지. 물론 부녀자들은 하루종일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춰 춤을 추고 놀이를 벌이느라 신명이 난다. 여왕에 즉위한 부녀자들은 이날 만큼은 부러울 것 하나 없고 부족함도 없이 힘든 농촌생활도 말끔히 잊어 버린 채 행복감과 평온함을 마음껏 누렸다. 마을부녀회장 민성자(54)씨는 "1년에 한번 하는 행사지만 마을 남자들이 여왕을 모시는 마음으로 대해 힘든 농사일로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고 삶의 활력소가 된다"고 말했다. 그래선지 대부분이 사과과수원이나 고랭지 채소를 하는 이 마을주민들의 소득이 다른 마을보다 많고 주민화합도 잘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을이장 김수현(60)씨는 "아내들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준다는 마음으로 이날 만큼은 마을의 모든 남자들이 직접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든다"며 "이 행사가 부부의 정을 확인시켜 가정불화도 줄고 있으며 주민 전체가 단합하는 계기도 되고 있다"고 말했다. (거창=연합뉴스) 지성호 기자 shch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