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정보기술(IT)업체들이 세계시장에서 찬밥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한때 선진 기술과 높은 브랜드 인지도를 자랑했던 유럽 IT업체들은 고임금과 연구개발(R&D) 투자 급감 등으로 경쟁력을 상실,합작 파트너 대상으로서의 매력이 없어져 해외업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기술력 향상에 갈 길이 바쁜 중국과 대만 업체들의 관심을 사는 정도다. 실제로 스웨덴 에릭슨과 일본 소니가 합작을 맺었던 지난 2001년 이후 프랑스 톰슨(브라운관)과 알카텔(휴대폰),독일 지멘스(휴대폰) 등이 합작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중국 및 대만업체와 손을 잡는 등 '몸값'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 특히 7일 대만업체에 휴대폰 사업부문을 매각했다고 발표한 지멘스는 이에 앞서 미국 및 한국기업과의 협상에서 "배울 게 없다"며 퇴짜를 맞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과 손잡은 지멘스 지멘스는 이날 세계 4위 규모인 휴대폰 사업을 대만의 휴대폰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업체인 벤큐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형태는 매각이지만 지멘스가 받는 돈은 한 푼도 없다. 오히려 6000명의 현 인력 고용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5000만유로를 주고 벤큐 지분 2.5%를 인수하는 방식이다. 사실상 공짜로 매각한 셈이다. 지멘스 휴대폰 사업은 고비용 구조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노키아와 삼성전자 등에 시장을 빼앗겨 지난해 말 현재 누적적자가 5억유로에 달하고 있다. 올 들어 네트워크사업과 휴대폰 사업을 합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나 지난 1~3월 중에도 1억3800만유로의 적자가 발생하는 등 실적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고 있다. 대만 중앙사통신에 따르면 지멘스는 당초 미국 모토로라와 협상을 벌였으나,모토로라가 독일의 높은 사회보장비용과 경직된 노동시장을 이유로 들어 협상을 돌연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멘스는 LG전자와도 접촉했고 팬텍도 한때 인수를 검토했으나 이들 회사는 "기술면에서 지멘스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결론에 따라 생각을 접은 것으로 전해졌다. ◆급락하는 유럽 경쟁력 지멘스뿐만 아니라 적자가 쌓이고 있는 유럽 IT업체들 간에는 아시아 기업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있다. 유럽업체들은 아웃소싱이나 사업구조조정을 통해 경영난을 타개하려 해도 고임금 등 고비용 부담으로 실적 개선에 번번이 실패,해외업체와의 합작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다. 스웨덴 에릭슨이 2000년 1분기 순익 급락 후 싱가포르 업체에 아웃소싱을 맡겼다가 이듬해 적자로 전환하자 일본 소니와 휴대폰 합작사를 출범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다. 아시아기업들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해외시장 확대 차원에서 유럽 기업들의 합작 제의를 받아줬다. LG필립스LCD 등 합작사들은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이후로 일본이나 한국에선 유럽과의 합작사가 나오지 않고 있다. 프랑스 가전회사 톰슨과 통신장비회사 알카텔이 지난해 중국 TCL과 각각 브라운관 합작사와 휴대폰 합작사를 출범시켰을 뿐이다. 유럽 기업들이 합작을 선호하는 것은 고용이나마 유지하겠다는 생각에서지만 아시아 파트너들은 이를 외면하는 추세다. LG전자와 필립스는 브라운관 사업을 합친 후 서유럽 공장 대부분을 폐쇄했고,벤큐도 독일에 있는 지멘스 생산 공장들을 단계적으로 없앨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대만은 관심 그나마 중국과 대만 회사들이 유럽 업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해외 시장에 진출할 때 이들의 유통망과 높은 브랜드 인지도가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TCL은 톰슨과 브라운관 합작사를 만든 후 미국 유럽 수출품에 RCA(톰슨의 브라운관 브랜드) 상표를 붙이고 있다. OEM이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해 국제적인 브랜드 대접을 못받는 벤큐의 경우도 지멘스라는 브랜드를 달아 국제 시장에 데뷔할 계획이다. 권영수 LG전자 부사장은 "유럽의 제조업은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전자 기술력면에서도 아시아와의 격차가 크지 않아 유럽에서 배울 만한 회사는 노키아 정도뿐"이라고 말했다. 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