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 소설가 > 어머니가 이른 아침에 전화를 하셔서 대뜸 "너, 혹시 매실 샀냐?" 물으셨다. "그건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거잖아요." 속으로는 그리 말대답을 하면서도 겉으론 그저 "아니요" 했다. "내 정신 좀 봐라 잉, 니한테 매실 보내는 것을 깜박 잊어 불고 있었더니만 해년마다 매실 사는 집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디 그이가 '아니, 넝뫼댁! 올해는 어쩌 매실을 안사요?' 물어서 생각이 났네.지달리다 혹시 니가 사버리나 해서 전화했다." 그러잖아도 지난 며칠 이따금 어머니가 왜 올해는 매실을 안보내주시나?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머니는 매실을 곧 보내겠노라 했다. 산에 가서 오늘 따온다고 했으니 오는 대로 보내겠노라고. 어느 해부터인가 오월 하순 무렵이면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매실을 보내주셨다. 택배로 도착한 종이박스를 풀어보면 그 속에 구슬만한 푸른 매실이 넘치게 담겨있다가 와르르 쏟아지곤 했다. 매실이 5kg이면 흑설탕도 5kg, 매실이 7kg이면 흑설탕도 7kg이 함께 따라왔다. 행여 설탕 사러 가기 귀찮아 매실을 홀대할까봐 아예 설탕까지 마련해 보내시곤 했다. 매실을 잘 씻어서 물기 없이 말리거나 닦고 유리 항아리에 매실을 붓고 설탕을 붓고 또 매실을 붓고 설탕을 부은 뒤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다독다독 한 뒤에 잘 봉해 놓으라 하셨다. 석 달이 지난 후부터 배 아플 때,갈증 날 때,소화 안 될 때,술 마시고 났을 때,강한 음식 먹었다 싶을 때 3분의 1컵쯤 즙을 따라 물에 섞어 한 컵을 만든 뒤에 마셔라 하셨다. 어머니께서 매실을 보내시겠다고 한 첫해엔 무슨 매실을 다 보내신다고 그러시나… 했었다. 도착한 매실 박스를 풀었을 때 와르르 쏟아지는 푸르고 둥근 매실의 생김새가 일단 마음에 들긴 했다. 눈이 다 시원했다. 물에 씻어 마른 행주로 하나하나 닦아내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머니가 매실을 보내주시지 않았으면 아마 나는 매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시키신 대로 해놓고 석 달 후에 들여다봤더니 세상에나 그 단단한 청매의 과육이 싹 녹아나고 껍질만 씨앗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 이후 내 집엔 매실즙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여름날에 손님이 오면 매실즙을 차가운 물과 섞은 뒤 얼음을 띄워 내놓았다. 어느 날인가 샐러드를 만들다가 즙 자체를 그대로 소스로 써봤는데 맛이 괜찮아서 그 뒤론 식초나 설탕을 넣어야 하는 음식에는 대부분 매실즙을 썼다. 집 뒤에 있는 산에 오를 때도 병에 담아가 따라 마시는 그야말로 매실즙의 나날들이 시작됐다. 이제는 오월 하순이 되면 어머니가 매실을 부쳐 주실 때가 됐는데 하며 당연히 기다리곤 했는데 올해는 유월이 왔는데도 어머니로부터 매실 소식이 없던 참이었다. 매실은 이틀 후에 도착했다. 매실을 받아놓은 직후로 바깥 일이 연달아 있어 매실을 풀어보지도 못하고 외출을 했다. 매실 박스를 부엌 구석에 내려놓을 때는 외출에서 들어오는 길에 바로 풀어볼 생각이었는데 어쩌나, 그만 매실을 깜박 잊은 채로 하루가 지났다. 매실을 잘 받았다는 전화를 드리는 일에도 당연히 소홀했다가 어느 순간 '아, 매실' 하고는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실이 온 뒤로 하루가 지나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려는 새벽 3시였다.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 나가 매실 박스를 풀어보니 다행스럽게도 매실은 상하지 않은 채로 동글동글하고 푸르디 푸르게 잘 있었다. 새벽 3시에 개수대에 물을 가득 받아 청매실을 쏟아붓고 씻어내는데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났다. 어머니가 안계시면 누가 내게 매실을 보내주나? 생각하다가 뜨끔했다. 그런데 왜 나는 매실을 당연히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 어디 매실만인가. 대체 내가 어머니에게 해준 게 뭐 있다고 이제는 늙어 병을 친구삼아 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끝도 없이 받아대기만 하지? 매실을 씻던 손길을 멈추고 물 속에 떠 있는 청매실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