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귀국으로 검찰 조사가 본격화됨에 따라 대우 해체와 김 회장을 둘러싼 궁금증이 상당부분 풀릴 것으로 보인다. 대우 계열사 임원에 대한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김 회장이 없는 상태에서 검찰조사가 이뤄져 재산 해외 도피 및 정·관계 로비 등의 혐의를 밝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 피고인들이 김 회장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움직인 탓에 해외 송금과 관련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데다 자금 운용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김 회장에게 집중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정황에 비춰볼 때 사건의 핵심 열쇠를 쥐고 있는 김 회장이 해외로 보낸 자금의 사용처를 낱낱이 진술하면 대우 사태와 관련한 객관적인 사실이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우가 몰락하기 전 정·관계를 대상으로 조직적인 로비가 이뤄졌는지도 밝혀질 수 있다. 특히 이 문제는 당시 권력 핵심이 김 회장의 출국을 적극 권유했다는 설과 맞물려 정·관계에 강력한 후폭풍을 몰아올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김우중 리스트'가 공개될 경우 정치권을 뿌리째 흔드는 변수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대우 몰락의 원인 재규명보다는 이 살생부의 존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누가 나가 있으라고 했나 김 회장 측근들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당시 권력층이 김 전 회장에게 외유를 권유한 정황은 충분한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구체적으로 누가,어떤 식으로 그 같은 의사를 전달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김 회장이 서둘러 중국으로 출국한 이후 오랫동안 귀국하지 않은 사실에 비춰볼 때 누군가로부터 귀국하지 말라는 '권유' 내지 '암시'를 받았을 개연성은 크다. 김 회장은 2003년 1월 미국 유력 경제전문지인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1999년 말 한국을 떠난 것은 검찰의 기소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해 파장을 일으켰다. 정권의 '핵심'이 김 회장에게 대우 몰락에 대한 형사적 면죄부를 주고 대우자동차 경영권 회복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출국을 설득한 게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김 대통령과 당시 핵심 경제관료들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김 회장의 측근인 석진강 변호사도 "김 회장에게 확인한 결과 '당시 채권단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은 있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적은 없다'고 했다"고 말했지만 의혹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정권의 핵심이 김 회장의 출국을 적극 권유한 것은 김 회장이 1997년 대선 당시 제공한 정치 자금의 실태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대우 사태로 재판을 받았던 한 대우 주력사의 최고경영자는 2001년 초 "저쪽에서 나가 있으면 모든 것을 원만하게 처리하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회장이 나갔는데 결국 그룹이 해체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김 회장 귀국으로 '저쪽'의 실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해외로 재산 빼돌렸나 해외 재산도피 문제는 김 회장은 물론 대우 사태로 법정에 선 대우 계열사 임직원들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대목이다. 재판부는 대우 해외법인이 허가 없이 차입해 빼돌린 20조7000억원과 대우자동차의 수출 대금을 영국에 있는 금융계좌(BFC)에 불법적으로 송금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BFC는 ㈜대우의 결산에 계좌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부외 계좌다. 부외 계좌로 돈을 보낸 것은 자금 용도에 관계 없이 재산 도피로 볼 수 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이에 대해 김 회장측은 외국환관리법을 위반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자금을 은닉한 사실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회계에 반영되지 않았지만 BFC 계좌 송금은 모두 해외 차입금을 갚는 데 썼다는 것이다. 만약 해외에 재산을 빼돌리려고 했다면 대우그룹의 외화 자금이 집중되는 계좌에 돈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란 설명이다. 김 회장측 한 인사는 "2001년 한 달에 걸친 금융감독원의 현지 실사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정·관계 로비 있었나 김 회장 귀국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뜨거운 감자다. 대우는 1999년 7월 극심한 자금난을 겪는 과정에서도 구조조정을 전제로 14조원 이상의 자금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이 대우 퇴출을 막기 위해 정·관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로비를 했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김 회장 조사 과정에서 '봐주기 수사'란 지적을 받을 것을 우려한 검찰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이 부분을 파헤칠 경우 자칫 비자금 파문으로 확산될 수 있다. 이와 관련,검찰 관계자는 "조사 과정에서 구체적인 로비 혐의가 드러나면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회장측의 한 인사는 "자금 사정이 악화된 이후에는 로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자금 회수가 본격화된 이후 로비를 했다면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정도"라고 설명했다. 다른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선거를 앞두고 정치 자금을 낸 적은 있지만 금융사에서 대우 자금을 본격적으로 회수하기 시작한 1999년 들어서는 조직적인 로비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익원 기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