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 회장은 '실패한 경영인'이다. 비록 그가 대규모 분식회계를 통해 금융사에서 9조원이 넘는 사기대출을 받고 거액 재산을 해외로 도피한 혐의로 사법부의 심판을 받게 됐지만 한때는 '세계경영' 깃발을 앞세운 '성취의 화신'으로 평가받았다. 장기 해외 도피생활을 마무리짓고 초췌하고 침통한 모습으로 검찰에 압송된 처지가 됐지만 김 회장은 창업(1967년) 17년 만에 대우를 4대 그룹의 하나로 일군 개발연대 성장의 주역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일탈된 행위가 엄정한 사법부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시각 한편에는 경영자로서의 자질과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다시 보자는 의견도 없지 않다. "김 회장은 단기적인 이익을 좇지 않고 성취를 위해 기업을 꾸려오다가 외환위기라는 복병을 만나 무너졌다."(실형을 선고받은 대우 계열사 임원) 성취를 위해서는 끝없이 영토를 확장해야 했다. 김 회장의 세계경영을 비판하는 쪽에서 그를 '끝없이 밟아야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를 탄 경영인'이라고 비유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우는 1970년대 말부터 조선 기계 자동차 등 중공업 분야로 영역을 넓혀갔고 1990년대 들어 해외로 뻗어갔다. 김 회장이 주력했던 분야는 중후장대한 기간산업.전후방 효과가 크고 고용을 많이 창출할 수 있는 쪽에 역량을 집중했다. '부실기업 사냥꾼'답게 다 쓰러진 옥포조선소를 맡아 정상 궤도에 올리고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한국기계를 인수해 곧바로 흑자로 전환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잇단 부실기업 정상화로 자신감을 얻게 된 김 회장은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 회장을 개발연대의 주역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간산업과 함께 대우그룹을 떠받친 또 다른 기둥은 수출이었다.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우겠다"는 김 회장의 수출 철학에 따라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는 전 세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메이드 인 코리아'를 부지런히 실어날랐다. 이 과정에서 동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 신시장을 끝없이 개척했다. 김 회장은 수출을 늘려야 제조업이 강해져서 성장하고 그래야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는 논리를 경영진에게 수시로 피력했다. 김 회장은 자동차 사업도 해외 현지생산을 하더라도 핵심부품은 국내에서 가져가면 수출을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다고 봤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등지에 1995년부터 3년 사이에 모두 16개 생산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척정신에서 비롯됐다. 누구보다 앞서 글로벌 경영에 나선 것이다. 지금 삼성 LG 등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러시아 시장을 호령하고 있다고 하지만 김 회장의 '세계경영'이라는 새로운 컨셉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브레이크 없는 전차를 몰듯,공격적으로 세계경영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해결책도 있다'는 낙천주의적 심성을 가졌기에 가능했다. 김 회장은 세계경영을 통해 몸집을 키우는 데 성공했지만 수익을 낼 정도까지 사업 경쟁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특히 차입에 의존한 사업 확장은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일순간에 한계를 드러냈다. 해외법인에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국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화를 조달해야 했다. 이를 위해 가공매출을 계상하는 등 무더기로 회계장부를 조작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시장은 대우에 등을 돌리고 대우는 더 이상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된다. 대우의 부채 60조여원은 금융권 부실로 이어지며 금융권 구조조정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1999년 말 대우채 환매사태로 자본시장은 전에 없는 혼란을 겪게 된다. 김 회장의 이 같은 잘못은 재판 과정에서 낱낱이 드러날 전망이다.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해법으로 김 회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세계경영은 자금조달 계획 등 치밀한 액션플랜 없이 진행되면서 결국 '과욕에 따른 빚더미 경영'으로 전락,오히려 국민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말았다. 이익원 기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