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회장의 비즈니스 감각에 대해서는 누구든 감탄을 금치 못한다.김 회장은 1967년 만 30세의 나이에 대우실업을 창립,불과 한달만에 30만달러어치의 원단을 수출했다. 이듬해에는 싱가포르의 트리코트(메리야스 제품의 일종으로 고리를 엮어서 짜는 편직제품)시장을 장악해 10배가 넘는 이익을 남기는 대성공을 거뒀다. 자본금 500만원짜리 신출내기 기업은 시드니 싱가포르 뉴욕 등에 속속 지사를 설립하며 창업 5년만인 1972년에 국내 2위의 수출기업으로 성장했다. 가히 ‘김우중 신화’라고 부를만한 쾌속 진군이었다. 하지만 최고의 상술과 최고의 상품이 결합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김 회장을 정점으로 한 대우의 영업망은 당대 최고의 조직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늘 취약한 제품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 회장의 뛰어난 마케팅 실력은 역설적으로 중급 품질과 취약한 브랜드를 만회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각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건을 파는 데 천부적인 감각과 수완을 갖고 있던 김 회장은 영업(수출)을 핵심으로 그룹의 조직을 구축했다. 자동차 전자 조선 건설 등의 계열사들은 김 회장의 분신으로까지 일컬어지던 ㈜대우에 얹혀 있었고 생산량과 매출액 목표 등도 ㈜대우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자동차를 주축으로 한 김 회장의 세계경영 역시 판매능력에 대한 과신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판매에는 와이셔츠나 자동차나 다를 것이 없다고 강조하던 김 회장이다. 그는 1995년 5월 폴란드 자동차회사 FSO를 인수하면서 현지 정부가 조건으로 내건 '종업원 2만명에 대한 고용유지와 추가 투자'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기존 인력의 30%만 남기겠다는 인수경쟁자 제너럴모터스(GM)의 전략에 비하면 파격이었다. 의아스런 표정을 짓는 폴란드 정부 관계자에게 김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생산량을 현 수준(5만대)의 네 배로 끌어올리면 2만명의 근로자 모두를 고용할 수 있다. 공장이 원활하게 가동될 수 있도록 협조만 제대로 해달라. 다른 건 몰라도 대우가 물건 파는 것 하나는 자신있다." 이 한판의 승부로 김 회장은 과거 합작회사였던 GM에 통렬한 일격을 날리고 동유럽 확장전략의 전진기지를 마련하게 된다. 김 회장은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시장의 고성장 가능성을 보고 과감하게 베팅을 했다. 50만대를 밑돌던 대우의 생산능력은 250만대로 불어났다. 김 회장의 머리 속에는 동유럽의 경제 재건→비약적인 경제성장률 유지→자동차 수요 폭발로 이어지는 장밋빛 시나리오가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장사꾼이라고 하더라도 시장 자체를 움직일 수는 없다. 김 회장은 신흥시장의 무한한 잠재력을 예상했지만 중국 인도 폴란드 우크라이나 시장은 예상했던 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다. 1997년 대우 해외공장의 가동률은 고작 30%선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남아도는 기계와 인력들을 무작정 놀릴 수도 없었다. "만들어라. 그러면 팔릴 것이다"라는 김 회장의 전매특허는 점차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손해를 보면서도 차를 만들어 팔 수밖에 없었고 밀어내기와 출혈판매는 대우자동차를 곪아들게 했다. 대우차의 재무구조 악화는 대우그룹의 사령탑 ㈜대우의 통제력 약화를 의미했고 조선 기계 등의 동반 부실화를 야기했다. 어쩌면 그는 세계경영이라는 원대한 이상에 걸맞지 않게 자동차라는 하이테크 제품을 와이셔츠와 같은 수준의 제품으로 인식하는 판단 착오를 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그의 발언 하나를 찾아볼 수 있다. "자동차는 하이테크가 아니라 미들테크다. 우리는 이 미들테크 분야에서의 경쟁이라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싼 차를 만들어 판매량을 늘린 이후 서서히 질을 높여가는 것이 유리하다."(1995년 7월 외교안보연구원 특강)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03년 1월. 쓸쓸하게 해외를 떠돌던 김 회장은 미국의 경제잡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눈물과 회한에 젖은 심경을 토로했다.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야심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자동차 부문에서 과욕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남들이 15년 만에 한 것을 5년 만에 이루려고 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