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 3블록 22호 두산디앤디 건물 2층 사장실.미국 교수 출신의 멋쟁이 최고경영자(CEO)일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빗질을 한 흔적이 없는 덥수룩한 머리,꽤 오래 입은 듯한 허름한 양복,유행이 지났어도 한참 지난 넥타이와 와이셔츠.세련미나 위엄도 찾아 볼 수 없다.
적어도 10시간쯤 실험실에 파묻혀 있다가 나온 연구원의 모습이다.
전명식 사장 자신도 멋쩍은 듯 둘러댄다.
"미국에서 세일할 때 산 양복이지요. 그냥 자연스러운 스타일이 좋아서요."
전 사장이 두산디앤디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지난 5월.미국 10위권에 드는 유수 공과대학인 카네기멜론대에서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그를 두산그룹이 오랜 공을 들여 낚아챘다.
두산디앤디는 대기업 계열사라지만 종업원 140명에 작년 매출이 100억원 정도에 불과한 중소기업.차세대 디스플레이 '유기 발광 다이오드(OLED)'장비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삼성전자 등에 납품하는 회사다.
미국의 권위 있는 교수 자리를 박차고 구멍가게 수준의 중소기업체로 자리를 옮긴 까닭은 무엇일까.
기자의 조바심을 눈치챈 듯 전 사장이 빙그레 웃었다.
"새로운 도전이잖아요. 한때 삼성그룹에서도 영입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고사했습니다.
삼성은 이미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만 두산디앤디는 성장 초기의 회사가 아닙니까.
그게 매력이라고 생각했지요. 더 작은 부문에서,더 낮은 수준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젊은 벤처기업인들처럼 말입니다."
아무래도 교수 생활이 훨씬 편하고 낫지 않을까.
예순을 넘은 나이에 도전이라니….
"도전에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카네기멜론대에서 교수 생활하면서 해마다 한 살씩 젊어진 걸요.
생리적인 나이는 한 살씩 먹었으나 매년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호흡했으니 오히려 젊어진 게 아닌가요.
일에 대한 열정,사고방식은 누구 못지 않게 젊습니다."
전 사장은 못 믿겠느냐는 듯 자신의 연구 실적을 공개했다.
그가 매년 작성한 논문은 평균 20여편.1980년 카네기멜론대 화학공학과 교수를 맡은 이후 500~60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호기심이 많은 탓에 주제도 다양해 화학 물리학은 물론 재료 기계 전자 등 거의 모든 이공계 분야를 논문 주제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그의 연구실에는 새벽 3시가 넘도록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CEO 업무는 생소하고 부담도 적지 않을텐데….웬걸.즉답이 돌아왔다.
"교수 생활을 하면서 어깨 너머로 회사 경영을 많이 배웠습니다.
80년대 SKC의 정보저장 매체사업부문 자문,90년대 중반 6∼7년간 삼성전자의 전기·전자사업부문 자문,90년대 후반∼2000년대초 일본 미쓰비시그룹 회장단 소속으로 기술사업부문 자문활동 등을 했습니다.
미쓰비시에서는 기업을 인수합병(M&A)하거나 일부 사업부문을 폐쇄하는 등의 경영 의사결정과정을 자문했지요.
당시 자문료로 백지수표를 받기도 했습니다."
전 사장은 기업들의 신규 사업 아이템에 대해 자문할 때는 언제나 흥분됐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전 사장은 변화가 없는 사람,도전이 없는 삶을 가장 싫어한다.
"국내 대기업을 관찰한 결과 두산그룹이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기업이라고 판단했어요.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하는 등 기존 소비재 중심에서 중공업과 기술사업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빠르게 바꿔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절대 '근친결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MIT 학부에서 공부했으면 다른 대학의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라고 야단을 쳤지요.
한 곳에서만 공부하고 일하면 변화가 없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봐요."
전 사장이 85년 미국 국적을 얻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미국의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해 보기 위한 도전이었다.
덕분에 방학 때 미 해군연구소의 핵잠수함 관련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기회를 얻었다.
두산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미국 국가연구기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라고 했다.
"CEO로서의 경험은 완성된 공학자가 되는 길이기도 하지요.
학교에서 접한 이론을 전반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학 교육이 기업현장과 산업발전에 가장 적합한지 검증하고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지요."
전 사장은 두산디앤디에서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는 경영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기적인 성장 발판을 마련하는 데 역점을 둘 것이라는 설명이다.
"나 다음에 오는 CEO를 염두에 두고 경영할 겁니다.
하지만 목표는 있어야겠지요.
두산디앤디는 2008년께 본격 도약할 거예요.
올해 매출은 작년보다 5배 늘어난 500억원으로 전망하고 있어요.
2008년에는 3000억원으로 키울 계획이지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의 전 사장.그러나 사업과 기술을 말할 때 안경 너머 비친 그의 눈빛에서는 20대 벤처기업인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