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 이화여대 교수 > 오늘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방한해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평행선을 달리는 역사인식,타협점이 보이지 않는 영토분쟁,북한핵문제 해법에 대한 인식차이,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둘러싼 갈등 등 올 들어 양국 간에는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불편해진 한·일 관계를 어떻게 제 위치에 올려놓아야 할지 서로 고민하고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성을 압도했던 흥분을 가라앉히고 양국 관계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큰 그림을 다시한번 그려봐야 할 때이다. 이 그림의 바탕이 되는 것이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이다. 한·일 FTA는 이미 지난 세기 한·일 공동연구에서 시작돼 비즈니스 포럼,산·관·학 공동연구회라는 5년의 논의를 거쳤으며, 2003년 12월부터 정부 간 협상이 시작됐다. 2005년 타결을 목표로 했던 협상은 현재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한·일 양국 간의 정치적 냉기류 때문이 아니라 일본 농수산물 분야의 시장개방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때문이다. 한국의 대일 평균 관세율은 8%로 일본의 대한 평균관세율의 2.5배 정도로 높은 편이기 때문에 한·일 FTA가 체결되면 한국의 대일 무역수지는 오히려 악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일본과 FTA를 추진하려고 하는 이유는 경쟁산업의 구조조정,규모의 경제 효과 극대화,일본의 대한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환경 조성,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유대강화 등의 가치를 중요하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일 FTA는 양국 서비스산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일 경제에서 서비스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농업과 제조업을 합한 것보다 큰 데 반해 효율성은 서방 선진 경제권에 비해 뒤처져 있다. 서비스산업의 생산성을 증대하지 못하면 양국의 경제성장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돼 있다. 일각에서는 한·일 FTA가 체결되면 한국의 자동차·기계·전자산업이 일본에 밀려 시장을 내주고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는 '제2의 한일합방'이 이루어진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런 논리로는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유럽연합(EU),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 경제규모가 상이한 국가끼리 체결된 FTA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밝은 곳이 있으면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경제통합의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경쟁력이 뒤지는 산업은 가혹한 구조조정의 압력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경쟁과 혁신의 압력이 제대로 작동해야 FTA를 통한 경제통합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런 압력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하고,경쟁에서 낙오되는 산업의 퇴로를 터주고 피해자들의 재활장치를 FTA 진행과 동시에 마련해야 하는 것이 고스란히 정부의 몫이라는 것쯤은 한·칠레 FTA 협상과 비준과정을 거치면서 체득하게 됐으리라. 만약 일본이 계속해서 FTA에 걸맞지 않게 농·어업 분야 개방을 우물쭈물한다면,한국은 미국 멕시코 캐나다 말레이시아 등과의 FTA 논의를 가속화시켜 일본만이 한국의 유일한 경제통합 파트너가 아님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국내 투자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반기업적인 노사관계를 선진화시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해 FTA 파트너로서의 한국을 더욱 매력있게 만드는 것이 말만 앞서지 않는 전략적 사고의 요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