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일 7번째 얼굴을 맞댔지만 예상대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특히 역사와 과거사 문제에서 노 대통령이 '낮은 수준'의 의제라고 규정한대로 역사공동연구 노력과 4년 전에 언급된 제3의 추도시설 건설 추진 등 두 가지에 재차 합의하는 데 그쳤다. 한국 입장에서는 절실하고 본질적인 과제인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즉각 시정,독도영유권 주장 중단,일본 주요 관계자들의 망언 중단,과거사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시정 등에서는 서로의 입장을 확인되는 데 그쳤다.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전혀 밝히지 않았고 독도문제는 만찬 전 공식회담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회담장의 분위기도 과거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연초까지만 해도 이번 회담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격의 없는 만남이 될 것으로 예상됐었다. 지난해 7월 제주도와 12월 가고시마의 소읍 이부스키에서 만났던 대로 편안한 '셔틀 외교'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올 들어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양국 사이의 40년 수교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일본발(發) 악재가 연거푸 터져나온 탓이다. 일본은 독도에 대해 국제적 관행·법규,역사적 사실을 무시한채 영유권을 주장했고,역사교과서 왜곡은 보수우경화에 불을 질렀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일 관계에 중국까지 가세하게 만들었다. 감정대립 양상이었던 양국 관계는 동북아 지역 전체 문제로 비화되는 조짐을 보였고,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기했다. 한 때 회담 연기론까지 나왔지만 당면 최대 현안인 북핵문제에서 양국 간 공조 필요성도 있어 회담 자체까지 거부하기에는 양국 모두 부담스런 상황이었다. 실제로 한국보다 일본측이 정상회담을 갖자는 데 더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 다. 물론 노 대통령 특유의 '실용 외교노선'이 여기에 동조를 했다. 양국 간 입장차는 회담시작 때부터 미묘하게 드러났다. 두 사람은 회담장인 상춘재(常春齋,늘 봄기운을 느끼는 곳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을 놓고 덕담을 건네며 인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바로 "정치라는 게 욕심으로는 항상 봄처럼 되길 바라지만 실제 정치는 심통스러워서 덥기도 하고 바람도 불고 그렇다"고 말을 건넸고,고이즈미 총리는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봄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고 화답했다. 공세적 입장에 가까운 노 대통령의 심경과 방어적·변호적 상황인 고이즈미 총리의 심경이 반영된 말들이다. 4시간이 넘는 회동에서 양국 간의 입장차를 다시 확인하는 데 그쳤다는 게 중론이다. 다만 현재 갈등 국면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관계발전을 위해 문화 경제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자고 합의한 대목은 "역사·정치와는 별개로 최악의 국면은 피하자"는 절실한 공감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허원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