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永勳 <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 IMF 이후 한국경제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국가발전을 위한 국론의 재결집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시점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5년8개월 만의 해외도피 끝에 귀국,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그의 위법 여부는 당국이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의 '과(過)' 와 '공(功)'은 냉정한 잣대로 평가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이미 오래됐지만 그동안 특히 김 전 회장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런 논란을 되돌아보면 과거 그가 쌓은 공과 저지른 과에 대한 평가가 구체성에 바탕을 두고 공정하고 냉정하게 진행되기보다는 비난이나 비판 위주로 흐른 감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평가를 바탕으로 실천적인 '실패로부터의 교훈'을 이끌어내기에는 아무래도 미흡한 것 같다. 물론 지난날 세계화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대우그룹이 끼친 국가적 손실과 특히 대우그룹 총수인 김 전 회장의 책임에 대해 국민적 규탄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그토록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세계적 기업으로서 이른바 '한(韓)민족시대'를 열어가는 개척자로서 대우그룹이 기여한 공로 또한 '한강의 기적'과 함께 세계사에 길이 남을 만하다고 본다. 우리에게는 한때 그토록 어려운 경제여건을 뚫고 세계적 기업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한 대우그룹의 실패를 거울삼아 21세기 세계화시대를 열어갈 건실한 경제발전의 초석을 새롭게 다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 외국 전문기관에 따르면 지금 세계에 알려져 있는 대우그룹의 브랜드 값이 100억달러를 넘는다고 한다. 특히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대우의 간판, 세계 구석구석에 버려져 있는 대우그룹의 잔여 재산, 지난날 세계 각국에 쌓아온 대우의 공신력, 그리고 대우그룹이 키워온 훌륭한 인재들은 그냥 버릴수 없는 소중한 국가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달 중순 중소기업 세계대회 참석을 위해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를 방문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나라 대사의 초청을 받아 현지 교민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들은 얘기는 충격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아직도 그곳에 남아있는 대우은행 사장과 대우선박 사장의 호소는 그냥 넘길 수 없는 민족의 슬픔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이탈리아 기업인에게 팔린 대우은행,그리고 프랑스인에게 넘어간 대우선박을 경영하면서 이국땅의 머슴들로 살아가는 자신의 운명을 끝없이 원망하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한때는 한국인이 5000명 넘게 살았던 그곳 루마니아에는 이제 400명도 채 안돼 남아있는 대우 가족들이 외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루마니아뿐 아니라 폴란드 체코 헝가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지난날의 세계적 영광을 누렸던 대우그룹의 실패한 역사는 비극이지만 남아있는 것들을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되살릴 수는 없는 지 착잡한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물론 지난날 해외기업을 향한 무모한 확장과정에서 김 전 회장이 끼친 국가적 손실에 대해서는 이제 법적으로 엄중하게 다스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김 전 회장에 대해 일방적인 매도나 비판을 가하는 것, 혹은 무조건적으로 그를 옹호하려는 입장 등은 어느 쪽도 국론만 분열시킬 뿐 국가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냉철한 국가의식과 화합된 국민의식을 토대로 세계화시대를 이끌어가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