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급등은 舊경제의 복수"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전 세계적인 정유시설 부족이 국제유가 급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중심으로 한 산유국들의 증산 여력이 부족한 가운데 미국 중국 등 주요 소비국들의 정유능력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수급사정을 더욱 악화시켜 유가 상승세에 기름을 붓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유시설이 부족한 것은 소비국들이 석유수요 증가에도 불구,지난 20년 가까이 관련 투자를 게을리한 탓이다.
골스만삭스는 이를 '구(舊)경제의 복수(revenge of the old economy)'로 표현했다. 디지털산업 등 에너지소비가 적은 '신(新)경제'에 도취된 나머지 구경제를 상징하는 정유시설에 대한 투자에 태만했던 '죄값'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정유설비 태부족
특히 세계 석유수요의 4분의1(하루 2000여만배럴)를 차지하는 미국 내 정유시설 부족이 문제다. 수요는 1990년대에 비해 2배로 늘어났지만 정유능력은 1981년과 엇비슷한 수준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유가가 지난 20일 시간외 거래에서 사상최고치인 배럴당 60달러(WTI 8월물)를 돌파,7년전인 1998년(연평균 14달러)에 비해 4배 이상으로 치솟은 데에는 이 같은 수급측면의 불균형이 큰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미국의 정유공장은 지난 20년간 채산성 악화로 301개에서 153개로 급감했다. 정유시설 가동률은 현재 97%에 육박,사실상 풀가동되고 있지만 1981년 하루 1780만배럴에 달했던 정유능력이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비슷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유능력 부족이 휘발유 디젤 난방유 등의 공급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원유시장의 수급불안감을 증폭시킴으로써 유가 상승폭을 더 확대시키는 악순환을 연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정유시설이 밀집된 멕시코만에 허리케인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만으로 유가가 급등하는 사례가 수시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국가의 정유시설 형편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시아에는 현재 200여개의 정유공장에서 하루 2000만배럴 정도의 석유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나 가동률이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90%를 넘어서는 등 여력이 빠듯한 상황이다.
◆설비확충까지는 수년 걸릴듯
정유능력 부족 문제는 소비국과 산유국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유가 책임공방에서도 이슈다.
미국 유럽연합(EU) 등 소비국들은 OPEC이 가격담합으로 유가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는 반면 OPEC은 "공급은 충분하다"며 정유설비 부족이 고유가의 원인이라고 맞서고 있다. 최근엔 앨런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까지 "정유설비 부족이 심각하다"고 지적,OPEC의 논리에 힘을 싣고 있다.
이에 따라 주요 소비국들은 정유설비 확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은 정유설비를 늘리기 위해 정유회사들이 낙후된 설비를 쉽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정유설비 개선특구'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석유소비국으로 부상한 중국도 향후 2년간 30억달러를 투자해 정유설비를 확대할 계획이다.
하지만 정유공장 증설로 공급난이 완화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중국 인도 등 주요 석유소비국들이 추진하는 정유공장 건설에는 최소 3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동열 기자 shin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