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선험의 동물이다. 보고 배우고 익힌 것을 의식·무의식적으로 따라한다. 언어가 대표적이고 사고와 행동도 마찬가지다. 은연중 갖게 된 생각이나 몸에 밴 태도를 바꾸기는 어렵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시집살이 힘들었던 며느리가 더 고약한 시어머니 된다'는 말은 이런 데서 나왔을 것이다. 사람은 또 사회적 동물이다. 아무도 혼자 살 수 없다 보니 집단의 풍토에 영향을 받는다. 눈치를 보느라 분명 문제인 줄 알고 바꿔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른 체 눈 감거나 적당히 넘어간다. 고치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가도 이해 관계를 고려,주저앉는 수도 많다. 실제 허례허식적인 혼사에 염증을 내고 "내 자식만큼은"이라고 다짐하던 사람도 정작 딸을 시집보낼 때면 남들처럼 치르기 일쑤다. 조촐하게 하고 싶었지만 결혼이라는 게 상대방이 있고 더욱이 남자쪽 위주로 진행돼 도리 없더라는 것이다. 혼수와 하객 초대 모두 일방적으로 조절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개인과 사회 할 것 없이 변화를 가로막는 요소 중 하나는 "다 그래 왔다"는 말이다. 옳지 않은 줄 누구나 아는 일들이"지금까지 다 그래 왔다"는 말로 얼버무려지고 묵인되고 용서되고 심지어 합리화된다. 치레투성이 경조사부터 법조계의 전관예우,정치인·퇴직 공무원을 위한 낙하산 인사,가혹한 신고식,법정과 점집의 반말까지. 전투경찰 대원들이 알몸으로 서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된 데 대해 "진급 신고시 간혹 있던 관행"이라는 해명(?)이 나왔다. '00할 때 그래 왔다'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라는 뜻인 듯 보인다. '다 그래 왔다'가 힘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나도 당했다"와 "나도 기회를 갖겠다"는. 잘잘못에 상관없이 "내가 거친 과정인데 너도"와 "남들 모두 누린 기득권인데 나라고"라는 보상심리가 '남들 생각도 해야지'라는 명목 아래 자리함으로써 문제가 반복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발전이란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억울해도 내 선에서 끝내겠다'라는 각오와 그에 따른 실천이 이뤄지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