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 나는 일본에 갈 때마다 도쿄 간다의 고서점 거리를 꼭 들른다. 지난 2월 동행한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은 망설이고 망설이다 중국의 '당시백경(唐詩百景)'사진집을 구입했다. 1만2000엔이나 하는 그 책의 구입을 정 선생이 망설인 것은 가격 때문이 아니라 책의 무게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넘겨본 그 책은 매우 수준이 높았다. 그런데 이 책이 한 공공기관의 창립을 기념해 발간됐다는 것과 1970년대 후반에 이미 이만큼 수준높은 책이 출간됐다는 것에 나는 매우 놀랐다. 정 선생과 함께 고서점을 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한 두권 사게 되는 과월호 잡지가 있다. 1965년에 창간된 'SD'(스페이스 디자인)란 잡지로, 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가 디자인한 1966년에서 1968년 사이의 것들을 주로 사모은다. 스기우라는 디자인 반세기를 기념하는 책자 '질풍신뢰'에서 당시 건축잡지들의 표지가 '장식하는' 디자인인 것에 의문을 품고 '내용을 나타내는' 디자인,읽는 디자인을 구현했다고 쓴 적이 있다. 40년 이상 건축책만을 편집했고 건축 평론가이기도 한 우에다 마코토(植田實)는 'SD'에서 시도된 '한낱 그래픽 디자인'이 이렇게 위력을 발휘한 예를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스기우라의 디자인(특히 표지)은 당시의 건축잡지는 물론 일반 인쇄미디어의 상식마저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이 잡지의 출판사는 가지마슛판카이로 한 건축회사의 자회사였다. 메세나 출판은 영세 출판사가 엄두내지 못하는 것을 기업이 지원하는 출판 형태다. 어떤 형태로든 월등한 차이를 보이는 기획은 기존의 상식을 깨부수는 발상이란 점에서 메세나적 이미지를 주게 마련이다. 비록 'SD'가 상업출판물이긴 하지만 기업은 책의 내용에 대해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가지마슛판카이는 'SD선서'라는 단행본 시리즈도 함께 펴냈는데, 이 시리즈는 근·현대 건축의 고전이라 불리는 건축사,건축평론,건축가에 의한 건축론을 총망라하고 있어 건축출판의 질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의 고서점에는 이렇게 메세나 출판의 형태로 출간된 책들이 무수히 꽂혀 있다. 올해 여름호를 끝으로 종간되는 계간 '책과 컴퓨터'는 1997년에 창간돼 8년 동안 총 32권을 펴내면서 전자화의 물결이 책의 세계에 미친 파장을 매우 냉정하게 분석해왔다. 이 잡지 또한 일본 최대 인쇄회사인 다이니폰(大日本)인쇄회사가 모든 자금을 지원했다. 메세나 출판은 그 목적이 사회에 대한 무료 서비스이든 이윤 추구이든 간에 기업과 출판 사이의 거리나 규모의 차이에서 생겨난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진행되든 한 나라 문화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일본 출판계는 이런 메세나 출판이 없었다면 결코 오늘의 성장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 상반기 종합베스트셀러에 '2010 대한민국 트렌드'(LG경제연구원 지음)란 책이 4위에 올랐다. 이 책은 잘 팔리면서 의미있는 책을 펴내고자 하는 출판사의 욕구와 대중적인 책을 펴내 기업의 친숙한 이미지를 키우려는 욕구가 맞물려 '성공'한 경우다. 이런 형태의 출판은 앞으로 더욱 늘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텍스트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한 단계 진전된 메세나 출판이 절실하다.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기획이지만 단지 자금이 없어 책을 낼 수 없는 분야에 우리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호화로운 사보 발간이나 스포츠 스타 육성을 통한 기업 이미지 고양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이며 나아가 국가 문화경쟁력을 근본적으로 키우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