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구 기자의 Art Story] 판화 팔지않고 나눠주었던 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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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1946~1986)은 80년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민중의 고통과 한을 특유의 강한 선으로 각인한 목판화로 잘 알려진 그는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다.하지만 그의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타계한 지 15년이 지난 2000년 들어서다.
오윤은 간경화로 죽기 두달 전 부산공간화랑에서 지방 순회전을 가졌다.자신이 태어난 부산에서 마지막 전시를 끝으로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아이러니다.당시 부산전시에서 출품작의 3분의 1 가량이 팔렸다.
작품가격은 판화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비교적 싼 편인 6만원선이었다고 한다.지난 96년 학고재화랑에서 열린 10주기 판화전에서도 오윤의 작품세계를 다시 조명하는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판매 면에서는 별로 재미를 못봤다.
오윤 작품은 2000년 들어서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99년까지만 해도 250만원에서 300만원 하던 판화 가격은 경매시장에서 꾸준히 팔리면서 상승세를 보여 최근에는 800만원에서 1000만원 대로 뛰었다.
지금까지 서울옥션 경매에 10여점이 출품됐는데 모두 팔릴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채색이 된 판화는 1000만원을 웃돌고 A급 드로잉은 1500만원을 호가한다.
지난 5월 서울옥션 경매에는 100호 크기의 유화가 처음으로 나왔다.
1980년 '현실과 발언'창립전에 출품됐던 '마케팅'시리즈 중 한 작품인데 무려 5300만원에 낙찰됐다.
그의 작품이 사후 15년이 지나서야 조명을 받게 된 데는 작품에 대한 평가와 관련이 있는 듯 싶다.
오윤은 민중미술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민족·민중미술이라는 카테고리에 국한시킬 수 없다는 게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다.
그는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다니던 시절 틈만 나면 전국의 산 절을 무전여행하면서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비롯해 조선민화 무속화 불화 탈춤 등 우리 전통문화와 양식에 심취했다고 한다.
작품의 양식이나 기법면에서 볼 때 우리의 전통미감과 민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작고한 지 내년이면 벌써 20년이 된다.
지인들과 유족으로 구성된 '20주기 기념사업회'는 내년 7월께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20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준비중이다.
오윤은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판화 원판 200여점을 비롯해 유화 20여점,테라코타 10여점 등을 남겼다.
드로잉은 수천점에 달한다.
회고전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세계를 보여줄 예정이다.
사업회는 이와 함께 서울이나 수도권에 오윤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마련 중이다.
오윤은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지인인 작가 허진무씨에 따르면 그는 작품을 원하는 사람에게 그냥 주곤 했는데 가져가는 사람이 사인해달라고 요청해야 사인을 해줬다고 한다.
워낙 그런 일에 무관심하자 심지어는 지인 몇 명이 사인을 대신해준 경우도 있다고 증언한다.
오윤은 '작품=돈'이거나 '소유의 개념'으로 보지 않은 것 같다.
철저하게 가난 속에 살았다.
오윤이 경주에 머물던 1973년에 그린 수채화 두 점이 6일 경매에 나온다.
얼마에 팔리든 간에 오윤이 살아 있어 자신의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는 것을 본다면 아마도 화를 낼지 모를 일이다.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