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활동 경력자도 있지만 전혀 관계없는 무고한 양민도 있습니다. 공권력에 의해 집단 학살된 이들은 생물학적으론 사망했지만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아직 사망처리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학살돼 집단 매장됐던 민간인의 신원을 밝히려는 한 사학자의 끈질긴 노력이 1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경남대 사학과 이상길(45) 교수는 태풍과 폭우 여파로 50여년전 매장된 유골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 일원에서 정식 발굴을 자청, 지난해 5월부터 두 달에 걸쳐 163명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는 국내에서 한국전쟁 학살 피해 민간인을 정상적인 절차로 발굴한 최초의 사례였고 이 교수는 대학측의 양해를 얻어 교내 컨테이너 박스에 이들의 유골을 개인별로 분류해 지금껏 보관하고 있다. 유족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수십명이 찾아왔지만 신원이 정확히 확인된 경우는 아직 전혀 없다. 비닐팩과 반지, 도장, 허리띠 등 신분을 추정할 수 있는 유류품도 다수 나왔지만 명확하게 사람을 특징짓는 것이 없는데다 유족들도 피살자의 '전력'을 의식해서인지 적극적이지 않은 예가 대부분이다. 이런 가운데 이 교수의 시선을 끈 유골 1구가 있었다. 전체적인 유골 보존상태가 좋고 양복 상의에 양복점 이름을 암시하는 '大松'이 새겨져 있었고 주머니엔 '泰仁'이라 새긴 목도장이 나왔다. 이 교수는 20대 초반에 키 165㎝가량으로 추정되는 '태인'을 찾으려고 피해자들이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끌려왔다는 증언을 토대로 진주와 하동 등지에 전단 1만여장을 뿌렸지만 제보는 전혀 없었다. 지난해 말 마침내 피해자가 자신의 외삼촌인 것 같다는 여수 송모(66)씨의 연락을 받고 만나본 결과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동일인일 가능성이 많은 데다 '태인'의 누나인 송씨의 어머니(87)가 생존하고 있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 교수는 동아대 김재현(고고미술사학과) 교수에게 '태인'의 얼굴 복원작업을 시도하는 한편 송씨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입수해 두개골 등을 대조시킨 결과 남매가 분명하다는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어렵게 송씨 어머니의 혈액을 채취한 후 마산시를 통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통사정해 DNA를 분석한 결과 염기서열이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검사비를 마련해 연세대 의대 법의학과 연구팀에 재감정을 의뢰했지만 역시 동일 모계 혈통으로 볼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지금도 이 교수는 좌익사상에 심취했던 형의 영향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해 군경위문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22살의 나이로 학살된 연극인 '태린'(泰麟)과 동일인이란 심증을 버리지 않고 있다. DNA 분석에서 동일 모계인 경우만 염기서열이 일치하지만 '태인'의 가계도 분석결과 사망자와 생존한 누나와 어머니가 다를 가능성이 큰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 교수는 지난 3일 경남대에서 이 같은 중간 결과를 발표하고 '태인'에 대한 보완조사와 일부 신원 확인 가능성이 있는 유골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유골로 발굴된 경우는 많지만 신원이 명확히 확인된 경우는 한 명도 없으며 여기엔 유족들의 자포자기도 한 몫을 하고 있다"며 "절차가 엄청나게 어렵고 까다롭지만 한 명이라도 신원이 명확히 확인된다면 관계기관에 종합적인 대책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마산=연합뉴스) 정학구 기자 b940512@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