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명 < 한림대 교수·정치학 > 외국에 자랑할 만한 우리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 아름다운 산수를 꼽을 수 있지만 제주도와 설악산 등 특별한 몇 군데를 빼면 외국인을 위한 관광지로 개발할 만한 곳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외국인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는 외국에 없는 한국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기본원리를 잊고 외국을 따라 하면 해외투자나 관광객 유치를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단견이 안타깝다. 우리 도시들은 경쟁이나 하듯이 한국적이기를 포기하고 외국 흉내에 몰두하고 있는데,그래서는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낮은 교양 수준과 엉터리 영어 실력을 자랑할 뿐이다. 흔히 서울의 모델로 싱가포르를 드는데,싱가포르는 옛 영국 식민지의 정체성을 현실적 필요에 적절히 이용하여 성공하였다. 그런 역사가 없는 서울이 이를 흉내 내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파리가 멋있다고 경주시가 무열왕릉 옆에 바로크식 석조건물을 짓는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겠는가? 우리는 또 상하이의 엄청난 발전을 부러워하지만 그곳 역시 서양 나라들의 조차지였던 역사와 최첨단 경제특구의 특징을 잘 아울러 손님끌기에 성공하고 있다. 그래도 상하이에 들른 외국인은 상하이가 중국 도시라는 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구석구석 중국적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든 상하이든 한마디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그것을 보고 싶어 찾아간다. 한국의 도시들 또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반드시 한국의 전통 문화를 고집하자는 말이 아니다.이는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그러면 오히려 우리가 중국의 아류임을 강조하는 역효과도 볼 수 있다. 서울은 자기 정체성이 없다. 서울은 우리 것을 집어던져 버리고 외국 것은 수준 낮은 잡탕으로 들여와 문화적인 변방이 되어버렸다. 역사ㆍ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파괴하고 없애버렸던 옛서울을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해야 한다. 청계천 복원에 성공한 경험을 살려 옛시가지를 복원하고 옛문화를 체험하는 장소를 한두 군데라도 만들어야 한다. 또 아직 남아있는 것 중 어느 부분은 반드시 후세를 위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래야 외국인들이 서울에 흥미를 느끼고 후손들이 조상들을 존경한다. 한국은 이제 세계에서 11위에 드는 경제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외국인이 우리를 인정하고 있는가? 또 우리 자신은 그만한 긍지를 가지고 있는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회의하는 가장 큰 까닭은 우리 경제력이 10위 안에 들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희미하고 독자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싱가포르대로,상하이는 상하이대로,그리고 도쿄는 도쿄대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야 한다. 서울도 예외일수는 없다. 이 도시들 가운데 서울처럼 자신을 잃고 대외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외국 모방에만 열중하는 도시는 없다. 비단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다. 서울이 대외적 위상 확립에서 위 도시들보다 뒤진다면 그것은 서울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서가 아니라 서울(한국) 사람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 속의 한국인 상을 정립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위 아 서울라이츠' 같은 어설픈 영어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의 전통을 현대에 맞게 가공하고 우리 것을 세계에 맞게 연마하는 데서 나온다. 또 외국 것을 우리에 맞게 재창조하는 데서 나온다. 그것이 한 나라의 문화력이다. 그 문화력은 경제력과 충돌하거나 종속되지 않고 이를 북돋우는 구실을 한다. 이제는 문화의 시대다. 아무리 경제가 커져도 문화의 힘이 받치지 못하면 금방 무너지는 모래탑일 뿐이다. 아직 우리는 이를 실감하는 수준에 오지 못한 것 같다. 특히 행정가들의 각성이 아쉬운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