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서울 성북동)을 1938년에 설립한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 그는 일제 암흑기에 고서화와 골동품 등 민족 문화재 수호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것은 물론이고 문화재 수집에 전 재산을 털어넣은 인물이다. 간송은 조선시대 최대의 지주였다.자손이 없던 큰 아버지댁 양아들이 됐는데 그의 나이 25세에 생가와 양가를 통틀어 유일한 적손(嫡孫)이 됐다. 당시 양가(兩家)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이 10만석.갑부로 소문났던 고려대 창립자인 인촌(仁村) 김성수의 재산이 3만석이었다고 하니 간송은 엄청난 유산을 물려 받은 셈이다. 배우개(종로) 상권을 장악한 것은 물론 가진 땅이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송파 가락동 창동 일대 등 서울 주변과 황해도 연안,충청도 공주 서산까지 뻗쳐 있었다고 한다.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간송은 망국의 한을 철저히 되씹었다. 그런 그가 문화재 수집에 전념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춘곡(春谷) 고희동과 감정(鑑定)의 대가였던 위창(葦滄) 오세창이다. 휘문고보 미술교사로 간송의 은사였던 춘곡은 "암흑시대를 밝힐 수 있는 길은 민족문화재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위창은 간송에게 서화골동의 감식안을 키워줬다. 간송은 두 은인의 도움을 받아 25세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서화골동을 수집했다. 10만석에서 나오는 양곡은 물론 갖고 있던 땅 대부분을 팔아야 하는 고통도 감내했다. 그가 사들인 미술품은 수천 점에 달한다. 특히 신윤복의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국보 제135호),기린모양의 향로인 '청자기린형향로'(국보 제56호) 등 1급 문화재가 많았다. 그는 수집해야 할 미술품이 있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골동 전문가인 장형수가 들려주는 일화.현재(玄齋) 심사정이 일생일대의 대작으로 심혈을 기울여 그려낸 길이 8m의 두루마리 산수화 '촉잔도권(蜀棧圖卷)'을 제기동에 사는 한 소장가가 갖고 있었다. 어떤 거간이 심하게 손상됐다는 이유로 농간을 부려 이를 1000원에 산 다음 간송에게 갖고 왔다. 간송은 두말없이 거간에게 5000원을 주고 그림을 샀다. 간송은 이를 일본 교토에 보내 수리를 시키고 표구도 깨끗이 했다. 그 때 비용이 6000원이나 들었다고 한다. 당시 수십간 크기의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으니 간송은 너덜거리는 그림을 기와집 다섯 채 값에 사고 정밀 복원 수리를 위해 기와집 여섯 채 값을 지불한 셈이다. 1943년 6월,간송은 한 브로커가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나 구입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게 얼마냐"고 물었다. 그 브로커가 1000원 정도라고 답하자 간송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1만1000원을 주며 "1000원은 수고비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간송 손에 '훈민정음'원본이 들어왔는데 지금 국보70호다. 간송은 골동 브로커들이 "이 정도 받으면 횡재다"고 생각하는 매도 금액에 비해 보통 세 배 내지 네 배 정도 높게 값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러니 좋은 물건만 나오면 브로커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간송에게 물건을 가져와 1급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간송은 어떤 서화골동을 얼마에 샀는지를 절친한 지인에게조차도 일절 얘기하지 않았고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연구실장은 "간송은 문화재 수집을 일종의 역사적 의무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얼마에 무엇을 샀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고 말했다.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