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입고 밭에 나갈 수 있겠어요?" 장마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주 KTX 동대구역.홈플러스 신선식품팀 심상호 바이어는 '양복쟁이' 기자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나무란다.


대구는 그야말로 찜통이다.


아침인데도 이마에는 벌써 땀이 흐른다.


시금치,얼갈이 배추,상추 등 엽채류를 맡고 있는 심 바이어는 무더운 여름이라 챙길 것이 더 많다.


"여름 채소는 하루살이입니다. 아침에 수확해서 그날 저녁까지 고객의 식탁에 오르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죠.그래서 한 달 후까지 매일의 수요를 예측하고 지금의 파종량까지 체크해야 합니다."


대구 근교의 배추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심 바이어는 품목별 파일을 펴들고,일산 횡성 담양 등 전국 각지의 채소 산지 영농조합에 전화를 거느라 정신이 없다.


때론 고성도 오간다.


"상추 한 봉지에 1000원 넘는 걸 누가 사 먹습니까." 상대 농민의 하소연이 수화기 밖으로 들려온다.


그러나 "됐고요. 가격은 무조건 1000원 이하로 맞추세요. 알았죠?"하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심 바이어.


"땡볕에 고생하는 농민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죠.하지만 할인점 간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악역'을 맡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이어의 '숙명' 아닐까요. 소비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요."


비닐하우스가 늘어서 있는 경북 칠곡군의 한 농장에 도착하자 홈플러스 협력업체 '성진영농조합'의 김종식 상무가 일행을 맞는다.


농민들과 함께 얼갈이 배추를 수확,500g 단위로 띠 묶는 작업을 하고 있던 그는 바이어를 보자마자 '판촉행사계획'부터 묻는다.


"피서용 '야채모듬' 행사 때 우리쪽 물건을 좀 많이 넣어 주셔야 합니다." 김 상무는 심 바이어의 손을 부여잡으며 신신 당부한다.


심 바이어는 전국 각지의 농민조합으로부터 일주일에 수십 건씩 이런 부탁을 받는다고 귀띔했다.


'성진영농조합'은 홈플러스에 채소를 납품하기 위해 대구 근교 농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법인체다.


홈플러스에 넘기는 채소만 한 해 60억원어치.


"예전에는 농협을 통하거나,농산물 도매시장에서 경매로 넘겼지요. 그런데 지금은 할인점에 직접 납품하니까 유통단계가 줄어 수입도 낫고,안정적으로 판매가 돼 좋습니다."


조합대표 장성기씨는 "4년 전부터 협력업체가 됐는데 어찌나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이 많은지 매우 힘들었다"면서도 "하지만 덕분에 농민들은 체계적인 영농법을 익힐 수 있었고,조합은 표준적인 포장출하시설을 갖추게 됐다"고 전했다.


농민들이 작업해 놓은 배추 단을 점검하느라 비닐하우스 안에서 흠뻑 땀을 흘린 심 바이어.이번에는 조합의 채소류 포장출하장으로 향했다.


비닐하우스와는 반대로 엽채류 포장 작업장은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추웠다.


"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죠.일단 밭에서 거둬들이고 나면 매장 진열까지 가는 전 과정에서 온도를 차갑게 해줘야 채소에 숨이 오래 붙어 있습니다."


작업장 한 편에서는 방금 뽑은 얼갈이 배추를 찬물에 씻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심 바이어는 물에 손을 담가 직접 수온을 체크하고서야 자리를 뜬다.


포장 전에 냉수처리를 하자는 아이디어는 '밸류체인'(value chain·홈플러스의 유통혁신프로그램) 회의에서 나왔다고 심 바이어는 설명했다.


회의에는 밭을 가는 농민에서 매장 판매사원까지 참여한다.


이제 매장진열 상태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홈플러스 칠곡점에 도착한 심 바이어는 사무실을 들르지 않고 바로 매장으로 향한다.


잠깐 동안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가 되는 셈. 어떻게 알았는지 어디선가 달려나온 점장에게 엽채류 매대의 개선점을 빼곡히 적은 메모를 넘겨주는 것으로 바이어의 하루는 끝나가고 있었다.


"할인점의 얼굴은 '가격과 품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어는 그 얼굴을 단장해주는 코디네이터 아닐까요?"


대구=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