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 < 서강대 교수.화학 > 한국물리학회와 대한화학회를 비롯한 기초과학 분야의 학술단체들이 초ㆍ중등학교 과학교육의 혁신을 요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교과별 형평성 때문에 과학의 중요성이 무시된 현재의 교육과정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개발 분야의 학술 활동에 전념하는 순수 학술단체들이 강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절실하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학술단체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과학교육에 대한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과학의 비중을 높이고 필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 기반의 치열한 국제 경쟁 시대에 과학교육은 선택의 대상일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부동산만큼이나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難題)다.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지만,구체적인 문제와 해결 방안에 대해서는 도무지 의견을 모을 수 없는 형편이다. 교육 당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사이에 국민 모두가 교육 전문가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이렇다. 최근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의 수학 능력은 놀랄 정도로 떨어졌다. 요즘은 고등학교에서 물리나 화학을 전혀 배우지 않은 학생들이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하는 일이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학부제 때문에 전공 이수 학점까지 크게 줄어든 대학으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다. 그 영향은 대학원에까지 이어진다. 부실한 전공 교육을 받은 인력을 활용해야 하는 기업에는 정말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공계의 교육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의 과학상식은 기가 막힌 수준이다. 매일처럼 광고에 등장하는 '알칼리'와 '전기분해'가 무슨 뜻인지를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고,현대 과학의 핵심 개념인 '엔트로피'를 영어 교과서에서 배워야 하는 형편이다. 그런 상황에서 엉터리 과학 원리를 앞세운 악덕 상술과 미신이 판을 치고,기술과 관련된 국책 사업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끊임없이 증폭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과학교육의 문제는 명백하다. 우선 지난 10여년 동안 과학교육의 비중이 계속 줄어들었다. 주5일제가 시행되면 더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학생들의 선택권을 존중한다는 그럴 듯한 명분을 앞세웠던 제7차 교육과정은 누가 보아도 참담한 실패작이다. 전공 교육을 위해 마련했다는 심화 과목 중에서 인기가 가장 높다는 '화학 II'를 선택한 학생들이 자연계의 13.9%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서라는 탐구 학습을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오늘날의 과학 교과서는 교사의 도움 없이는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비서(秘書)가 돼 버렸다.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교육과정에서 현대 사회에서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과학 개념들이 제외돼 버리는 기막힌 일도 생겼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가르치는 것과 처음부터 쉬운 내용만 골라서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학생들이 싫어한다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필요하다면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가르쳐야 한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과목별 비중은 시대적 사회적 요구가 제대로 반영된 과목의 난이도를 근거로 결정돼야 한다. 오늘날 과학은 이공계를 진학하는 영재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꼭 요구되는 필수 상식이다. 과학기술자에게나 필요한 탐구 방법이 아니라 유능한 민주 시민에게 필요한 과학 상식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르쳐야 한다. 어설픈 교육학 논리로 과학교육을 망치는 일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