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구 기자의 Art Story] 기와집 15채값에 사들인 '청화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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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가 중반을 지나 드디어 청화백자 순서가 되자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시작가는 500원.경매사가 "자!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하자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하게 호가를 부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3000원을 넘어 5000원으로 올라갔다.
당시 조선 자기로 한 점에 2000원 이상 가격에 팔린 게 없었고,군수 월급이 70원이던 시절이었다.
6000원을 무난히 넘고 누군가가 7000원을 호기있게 부르니 주변에 침묵이 흘러 그 값에 낙찰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신보라는 한 일본인 고미술상이 대뜸 8000원을 불렀고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보고만 있던 또 다른 일본인이 9000원을 불렀다.
신보는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을 대신해 매수에 나선 대리인이었고 9000원을 부른 일본인은 당시 세계적인 골동품 회사였던 일본 야마나카상회(商會)의 주인 야마나카였다.
야마나카상회는 교토에 본점을 두고 베이징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계 각처에 지점을 두고 있는 거대 자본이었다.
청화백자를 놓고 벌이는 간송과 야마나카의 싸움.누가 봐도 간송에게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간의 경합은 1만원을 넘어서면서 호가가 500원 단위로 내려갔고 간송측이 1만4500원을 부르면서 10원 단위로 다시 낮아졌다.
야마나카는 1만4550원을 마지막으로 부르고 포기했다.
경매사가 '탕'하고 책상을 힘껏 치자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낙찰가는 1만4580원.경성미술구락부에서 열린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순간이었다.
골동계의 원로였던 송원(松園) 이영섭은 역사에 남을 만한 경합 상황을 저서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30년'에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당시 수십 간짜리 큰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 내외였다.
간송은 청화백자 한 점을 큰 기와집 15채와 맞바꾼 셈이다.
간송은 무리를 하면서까지 왜 이 백자에 집착했을까.
경매가 있기 2주 전 저녁 무렵,간송은 한 술집에서 신보를 만났다.
이 일본 상인은 "청화백자를 무리를 해서라도 구입하면 지난번에 사들인 '상감청자운학문매병'과 짝을 이뤄 소장가로서 그 이상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이라며 간송에게 결단을 요청했던 것이다.
간송이 오기(?)를 부린 끝에 사들인 이 청화백자는 높이 42.3cm,아가리 지름 4.1cm,밑 지름 13.3cm 크기로 1996년 11월 일제 지정 문화재 재평가에 의해 보물 제241호에서 국보 제294호로 등급이 조정됐다.
하나의 작품에 붉은색 안료인 진사(辰砂),검은색 안료인 철사(鐵砂),푸른색 안료인 청화(靑華)를 함께 곁들여 장식한 도자기는 이 청화백자가 유일하다.
병의 앞뒤 양면에 국화와 난초를 그렸고 벌과 나비들이 노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무늬는 돋을무늬로 난초는 청화,국화는 진사,국화 줄기와 잎은 철사,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채색했다.
이 청화백자는 같은 종류의 조선 백자 중 큰 편에 속하며 유약의 질,형태의 적절한 비례감,세련된 문양 표현으로 보아 18세기 전반 경기 광주의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백자는 1991년 11월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간송 30주기 기념전'때 국내에 딱 한번 공개됐다.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