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에 계류돼 있는 거대권력 관련 사건은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25일 오후 늦게 법무부 검찰국장을 통해 대검찰청에 유선으로 긴급 전파된 뒤 26일 서면으로 일선 검찰청에 하달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일성(一聲)이다. 안기부 불법 도청으로 불거진 정-언-재 커넥션 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지는 상황에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전.현직 검찰 간부 등 20여명이 고발된 직후 나온 것이어서 심상치 않다. 특히 천 장관이 언급한 `거대권력'은 1997년 안기부 불법도청은 물론, 그 이후 제기된 각종 불법행위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정치권, 재계, 언론, 국가기관을 지목하는 것이어서 향후 검찰의 수사관행이 개선될지 주목된다. ◇재벌 수사 `지연' 관행 사라질까 검찰은 그동안 재벌과 관련된 각종 고소, 고발 사건은 형사소송법 규정을 어겨가면서 몇 년씩 처리를 미루다 대부분 무혐의 결정을 내려 `재벌 앞에 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형사소송법 257조에는 고소 또는 고발에 의해 수사한 경우 검사는 사건이 접수된 지 3개월 이내에 수사를 마무리해서 공소제기 여부를 결정하도록 돼 있지만 재벌 관련 수사에서 이런 처리시한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인 재벌 관련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은 2000년 6월 법학교수 43명이 고발한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관련 건이다. 검찰은 사건 접수 뒤 공소시효를 저울질하며 끌어오다 3년 6개월여만에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 등을 불구속 기소했고 곧 1심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다. 검찰은 또 한화그룹 계열사들이 내부 주식 거래를 통해 이익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부채비율을 축소했다며 참여연대로부터 고발당한 사건도 2년5개월여만인 올 3월 무혐의 처분했다. 이 사건은 참여연대측 항고로 서울고검에서 아직 진행 중이다. 작년 4월 참여연대가 이수빈 회장 등 삼성생명 전.현직 임원 6명을 배임 혐의로 고발한 사건은 금융감독위원회에서는 제재조치를 받았지만 1년만에 무혐의 결정이 났고 참여연대는 이에 불복해 항고했다. 삼성카드와 삼성생명은 이달 초 금융산업 구조개선법 위반 혐의로 전.현직 대표 이상 등이 검찰에 고발됐고, 이 사건과 관련해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등도 함께 고발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이번에 안기부 불법도청 자료를 통해 폭로된 삼성그룹 불법자금 살포설도 정치자금법 공소시효 제한 때문에 특가법상 뇌물죄를 적용할 여지가 있는 기아차 인수로비 의혹에 수사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 검찰에 거대권력 관련 사건이 새롭게 추가되는 셈이다. ◇ 국가기관 권력 남용 견제 신호탄(?) 천 장관이 직접 거대권력의 남용과 횡포를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은 국가정보원(옛 안기부) 등 권력기관의 탈법을 검찰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정원, 경찰 등 막강한 정보력을 지닌 국가기관의 탈법행위를 검찰이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자칫 국가 권력기관 사이의 경쟁으로 비출 수도 있지만 수사, 기소권이 있는 검찰로서는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는 게 검찰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검찰은 이러한 당위성에도 그동안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기관의 범죄 의혹에 적극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일례로 검찰은 올 4월 2002년 대선 직전 논란을 빚은 국정원 도청의혹 사건과 관련,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참여연대로부터 고발된 신건 당시 국정원장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려 논란을 빚었다. 국정원 관계자들의 조사와 국정원내 감청시설 등에 대한 현장 조사 결과 불법 감청을 하고 있다거나 휴대전화 감청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 않았다는 게 당시 검찰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번 안기부 도청과 관련해 도청 전담 특수 조직이 있었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불법 도.감청이 이뤄졌다는 정황이 포착된 데다 천 장관의 지시까지 겹쳐 지난번 도청 의혹과 달리 처리 방식에 큰 차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종빈 검찰총장도 26일 "법적으로 국가기관의 불법 도청은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유포 행위는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며 이 부분에 대한 고발 없이도 수사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공수처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등의 문제로 사면초가에 놓인 검찰 조직이 이번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을 `거악 척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역할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광철 기자 mino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