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盧대통령의 신세갚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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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직후 자신의 후원회장을 맡았던 이기명씨에게 서신을 썼다. '용인땅'매매 등 측근 간 거래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이기명 선생님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긴 편지로 그의 입장을 해명했다. '선생님'이라며,시종일관 깍듯한 표현에다 '2003년 6월5일 새벽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으로 끝난 이 공개 편지는 대통령 서신의 효시다.
한참 뒤 청와대의 한 참모는 이 서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것으로 이기명 회장에게 진 은혜의 일부를 갚은 셈 아니겠나. 고령의 이 회장에게 줄 자리도 마땅찮고…."
이후 노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TV프로그램에서 오랜 참모인 안희정씨를 '동업자'라고 규정했다.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안씨가 대선자금 문제로 사법처리를 받고 공직기용에 어려움이 생기자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시한 것이었다. '천금'과도 같은 대통령의 말로 나의 동업자라며 '정치적 백지수표' 한 장을 끊어준 셈이었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TV대화에서 말로써 신세를 일부 갚은 것이었다.
대통령의 말이 중천금이라 해도 신세갚기가 말로만 끝난 것은 아니다. 지난해 총선에서 영남권에 나섰던 이철 이해성 한이헌씨 등은 공기업 사장으로,오거돈 추병직 이재용씨 등은 장관으로 기용했다. 그보다 앞서 대선 때 도움을 줬던 이정우 김대환 윤성식 성경륭 권기홍 윤덕홍 이종오 교수 등에게는 국정자문위원회나 부처를 맡겼다.
정치권 인사 중 신상우 이재정씨 경우는 민주평통 부의장직을 줘 과거를 잊지 않았고,정대철씨에 대해선 그의 아들을 대통령 비서실에 채용해 챙겼다. 김두관 정치특보처럼 보은과 기용 사이의 구별이 애매한 인사도 많다.
시대가 변해 대통령의 보은은 전반적으로 수월치 않게 됐다. 정치자금 제한,인사시스템 변화 등 노 대통령 스스로가 주도한 요인들이 많다. 지난해 총선 전 청와대 참모들이 출사표를 던질 때다. 당시 출마 인사차 방문한 서갑원 김현미 정만호 권선택씨 등 비서들에게 노 대통령은 녹차 한 잔에다 한 명씩 다정하게 사진을 찍어주는 외에 해준 게 없었다. 이전 같으면,두툼한 봉투 하나쯤 쥐어줬겠지만 달랑 개별사진 한 장으로 측근임을 최대한 선전,활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대통령에게는 신세 갚을 방법이 많다. 헌법에 보장된 사면권이 대표적 예다. 그런데 광복 60주년 올 8ㆍ15 사면을 앞두고 최근 청와대의 고민이 깊다. 법과 원칙대로만 가면 되지만 그게 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신세 갚을 사람들은 많이 남았는데,여론의 눈초리가 여간 신경쓰이지 않는다.
더구나 앞서 석탄일 경제인 사면 때 측근인사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포함되면서 비난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공신들 중 안희정씨가 오히려 사면명단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는 소식은 신선하다. 진짜 측근은 좀 다르다.
당위론과 인간적인 의리나 정 사이의 고민 같은 것이 엿보였다. 보은은 한국의,또 인류의 오랜 미덕이다. 그러나 지도자는 다르다. 대통령이 신세를 분명히 갚는,그래서 그 점에서 '훌륭한 개인'이 되는 만큼 사회 시스템은 그만큼 흐트러지게 된다.
허원순 정치부 기자 huhws@hankyung.com